상제님의 양자, 강석환
교무부 이호열

상제께서 객망리 본댁에 돌아와 계실 때에 가족들에게 매사 부대 자연래(每事不待自然來)라고 이르시고 성회(聖會 : 석환 생가 조부)의 집에 가셔서 영택(永澤 : 석환의 부친)에게 “장차 나를 대신하여 가사를 돌보라. 고목에 꽃이 피리라”고 이르시니라. (예시 64절)
상제님께서는 슬하에 딸 강순임(姜順任, 1904~1959)만을 두셨기 때문에, 화천하시기 전 문중의 일가(一家)인 강영택[姜永澤, 1898~?, 족보에는 ‘영탁(永鐸)’으로 표기]01에게 “장차 나를 대신하여 가사를 돌보라”는 뜻을 전하셨다. 그러한 뜻을 이어 강영택은 상제님 부친(姜文會)의 장례식(1916) 때 상주(喪主)로서 역할을 다하였고,02 강영택의 아들 강석환(姜石幻, 1920~1993)도 상제님의 사후양자(死後養子)로 입양되어 대를 잇게 되었다. 강석환은 『전경』 「예시」 55절과 64절에 이름이 나타난다. 그는 1974년 『전경(典經)』 초판 발간 당시 ‘『전경』 편찬위원회’ 대표로서 『전경』의 독자성과 대외적인 위상을 세우는 데 기여한 바 있으니, 그의 주요 활동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그가 남긴 「무오동지치성 심고문(戊午冬至致誠 心告文)」과 주변인들의 전언을 통해 그의 행적과 삶의 태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상제님께서 후손에게 전하신 병풍 “아직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불효라고 하겠으나 나는 부모의 앞길을 닦아 드리려고 내가 항상 형편을 살피고 있으니…”03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듯이, 상제님께서는 천지공사를 행하시는 가운데서도 항상 부모의 앞길을 생각하고 형편 살피기를 등한히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화천 이후를 내다보시며 객망리에 살던 강씨 문중의 일가인 강영택에게 “장차 나를 대신하여 가사를 돌보라”는 뜻을 전하셨다. 유교 문화권에서 가족 및 제사를 부양하고, 가계를 계승하여 가문을 존속하기 위한 방법으로 가까운 인척 중에 양자를 들여 대를 잇게 하는 것은 당시 중요하고도 빈번한 관례의 하나였다.

▲ <진주 강씨 박사공파 문중 가계도>
진주 강씨 박사공파 9대 강이온(姜利溫)의 손자 강세의(姜世義, 1492∼ 1547)가 고부로 낙향하여 객망리에 강씨 가문이 형성되었고, 그로부터 6대를 내려와 17대의 진창(晋昌)ㆍ우창(愚昌)ㆍ응창(應昌) 삼형제 분이 나왔으며, 상제님의 인신(人身)은 종가인 진창의 6대손이셨고 강영택은 바로 진창의 동생인 응창의 6대손이었다.04 강영택의 부친 강성회(姜聖會, 1859년생)의 집은 상제님의 본댁과 마주 보는 이웃에 자리하였기에 상제님께서는 그곳에 자주 왕래하며 가까이 지내셨으리라고 생각되며,05 강석환의 조부인 강성회와 상제님의 부친 강문회는 유달리 친족의 정이 두터웠다고 한다.06 또한, “강연회(姜然會)와 강기회(姜驥會)는 기골이 장대하고 기력이 출중하여 가끔 상제님과 힘자랑을 하였느니라.”07라고 『전경』에 나타나는데, 이들은 곧 강성회의 동생들이었다.08 상제님께서 시루봉 아래 등판재를 내려오시며 강영택에게 “장차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석환(石幻)이라 하라”09고 말씀하셨다고 하며, 이후 강영택은 첫아들을 낳고는 돌림자인 형(馨)에 맞추어 이름을 경형(炅馨, 1920∼1993)이라 지었고 자(字)를 석환(石幻)으로 하였다.10 그리고 상제님 모친이신 권씨 부인께서 어린 석환을 귀여워하여 대여섯 살까지 길러 주셨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11 『전경』 예시 55절에
상제께서 앞뒤에 친히 쓰신 병풍 한 벌을 재종숙이 되는 강 성회(姜聖會)에게 주신 것을 그 후 석환의 종형인 강 계형(姜烓馨)이 간수하고 있다가 상제께서 화천(化天)하신 十一년 후에 입양12한 강 석환(姜石幻)에게 전하였느니라.
라고 나타나듯이, 상제님께서는 친히 병풍 한 벌을 쓰시고 그것을 강성회(강영택의 부친)에게 전하셨는데, 그 병풍에 쓰여진 글귀의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戒爾學立身 莫若先孝悌 怡怡奉親長 不敢生驕易 너에게 입신하려는 배움에 대해 경계하노니, 효제보다 우선한 것이 없노라. 온화하게 기쁜 마음으로 부모와 어른을 받들고 감히 교만하거나 함부로 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 戒爾學干祿 莫若勤道藝 嘗聞諸格言 學而優則仕 너에게 녹을 구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노니, 도와 예(藝)를 부지런히 닦는 것만한 것이 없노라. 일찍이 여러 격언을 들으니 학문이 넉넉하면 (저절로) 벼슬한다 하였다. 戒爾遠恥辱 恭則近乎禮 自卑而尊人 先彼而後己 너에게 치욕을 멀리함에 대해 경계하노니, 공경함이 곧 예에 가깝노라.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며, 남을 먼저하고 자기를 뒤로 해야 하느니라. 擧世好承奉 昻昻增意氣 不知承奉者 以爾爲玩戱 온 세상이 받들어 주는 것을 좋아하여 으스대며 의기(意氣)를 돗구나니, 떠받드는 자가 너를 노리개로 여김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 병풍에 쓰여진 글귀는 『소학(小學)』의 「가언제오(嘉言第五)」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신 것인데, 이는 삶에 있어 경계해야 할 바를 언급하신 것으로 부모와 어른을 받들고 교만하지 말며 도와 예를 닦을 것과 공경함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특히 맨 아래 구절은 ‘온 세상이 받들어 주는 것에 으스대지 말라’는 취지로 마치 상제님께서 미래의 후손에게 전하는 경계의 말씀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상제님의 후손에 대한 가르침이 병풍에 쓰여져 강성회(강석환의 생조부)로부터 강석환에게 전달된 것이다.
『전경』 편찬위원회 참여 강석환은 1920년 전라북도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에서 강영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석환의 생부(生父)인 강영택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상제님으로부터 “나를 대신하여 가사를 돌보라”는 뜻을 전달받은 인물이며, 진주 강씨 문중 가계도를 살펴보면 상제님과 같은 항렬의 인척이다. 강석환은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귀국하여 교직에 몸담은 후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웃에 살던 마을주민 김동일(1947년생)에 따르면, 자신은 청소년 시기에 강석환과 함께 당시 신월리 마을의 최연장자였던 송월댁 할머니(강성회의 둘째 며느리)로부터 상제님의 재세 시 일화나 말씀을 상세하게 전해 들었고, 당시 강석환은 인근 여러 곳을 다니며 상제님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다고 한다.13 이러한 사실을 볼 때 강석환은 이미 1960년대 초반 혹은 그 이전부터 상제님에 대한 자료를 조사해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석환이 남긴 우리 종단에 대한 의미 있는 공헌은 1974년 『전경』 초판 발간과 관련된다. 이순범 실장14은 1970년대 초 도전님의 명을 받들어 서울 종로구 신설동에 사무실을 마련하였고, 그곳에서 서울대 장병길 교수를 중심으로 몇몇 종단 임원들이 함께 참여하여 『전경』 편찬 업무를 진행하였다.15 그 시기에 강석환은 정읍에서 초등학교에 근무하였지만, 방학 때만 되면 이순범과 함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고 상제님의 행적이나 말씀에 대한 조사를 위해 많은 시간의 공을 들이며 『전경』 편찬 업무에 기여했다고 한다.16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강석환은 『전경』 초판(1974)에 대해 『전경』 편찬위원회 대표로서 발간사를 남겼다. 당시는 상제님을 신앙하는 여러 교단이 상제님에 대한 각각의 기록과 저술을 남기던 때였다.17 상제님의 행적과 말씀에 대한 기록과 해석이 조금은 제각각일 수 있던 상황에서 강석환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당대 지식인으로서 “선대의 행적을 후손이 가장 잘 알지 누가 더 잘 알겠는가?”라고 주장하며 명분을 갖추고, 『전경』 내용의 정확성과 독자성을 대외적으로 인정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강석환의 『전경』 편찬위원회와 관련된 활동은 학술적으로도 상제님의 사후양자(死後養子)인 강석환이 그 대표를 맡음으로써 상제님 관련 기록에 대한 분쟁의 소지를 없애면서 강씨 문중 자료가 추가될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18 강석환은 매달 한 번 정도 서울 중곡 도장에 찾아와 상제님께 참배를 드렸고,19 그때마다 도전님께서 반가이 맞이하시며 도장에 며칠씩 머무르게 하셨다고 한다.20 이러한 과정을 지켜 보았던 성기석 교감(도전님 기사)도 “강석환씨가 『전경』의 대외적 위상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언급하였다.21 우리 『전경』에는 『대순전경』에 나타나지 않은 진주 강씨 문중 내력, 삼신산 및 객망리 지명, 시루봉 공사, 신작로 이야기, 대원사 주지인 금곡의 수명 연장, 정집전 관련 일화 등 상제님의 여러 행적과 일화가 언급되어 있어 기존의 경전과 차별화되는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다.22 여기에 강석환이 여러 지역을 찾아 다니며 자료조사를 통해 상제님의 일화나 말씀을 새로 발굴하여 전하는 등 의미 있는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강희용(강석환의 장남)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는 없으나 부친(강석환)께서 도주님으로부터 회중시계를 선물받았고,23 자신도 어릴 적에 부친(강석환)을 따라 부산 태극도 도장에 간 적이 있다고 하였다. 특히 고등학교 2학년(1965년) 여름방학 때에는 “태극도 도장 내실에서 한 달간 기거하며 부산의 입시학원을 다녔다”24라고 증언하였다. 또한 이웃 주민 김동일의 증언에서 “강 교장(강석환)은 증산 선생에 대한 자료조사를 일찍부터 해 왔고 나에게 『선도진경(宣道眞經, 1965)』이라는 책을 한 권 주면서 읽어 보라고 하였는데, 나는 그 책이 강 교장이 만든 책인 줄 알았다”25라고 하였다. 이러한 증언들을 볼 때 강석환은 이미 도주님 재세 시는 물론 도전님께서 영도하시던 시기에도 태극도 도장에 출입하였고, 도전님께서 발간하신 태극도 『선도진경』 편찬에 있어서도 자료조사 작업에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상제님 강세지 기념사업에 대한 염원 강석환은 양자로서 상제님에 대한 효심과 공경심이 지극하였다. 그러한 내용은 그가 생전에 남긴 「무오동지치성 심고문(戊午冬至致誠 心告文)」26에 나타난다. 「무오동지치성 심고문」은 1978년 12월 22일(양력), 강석환이 친지 및 교중(敎中) 여러 형제(諸兄弟)와 함께 동곡 약방에 상제님의 진영을 봉안함과 동시에 치성을 모시면서 심고 내용을 적은 7,000여 자로 된 글이다.
아버님 귀천(歸天: 넋이 하늘로 돌아가다)하옵신 지, 만 칠십 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무오년 동지 치성을 기하여 소자 다년간의 숙원이었든 아버님 성영(聖影: 성스러운 진영)을 동곡 약방에 봉안하옵고 친지와 교중 제형제를 모시고 함께 치성을 올림을 아버님 영전에 삼가 심고하나이다.27 (중략) 천지간의 모든 도통 신명들로 하여금 집찬(執讚: 맡아 다스리고 기리다)케 하사 어김없이 봉행케 하여 실현하게끔 물샐틈없는 도수로써 천지공사를 주재하시고 우리 대한민국을 장차 세계의 종주국으로서 세계 문화와 안녕질서를 영도하게 공사를 보시고 유지범절(儒之凡節)의 기령(氣靈: 氣와 靈)을 따서 대나무 열 마디 도수를 따라 도통을 내게 하실 언약을 하시고 선지조화(仙之造化)의 기령(氣靈)을 따서 조화로서 천지를 개조하시게끔 공사를 보시고 불지양생(佛之養生)의 기령(氣靈)을 따서 천하 만인의 의식주 생활을 해결하실 법도로 삼으시니 이로 후천의 신천지 건설계획은 원포(圓浦)히 설계하시었고 이를 추(推)하여 무궁한 발전이 이루어짐을 확신하는 바입니다.28
이 글에는 동곡 약방에 상제님의 진영을 모시며 올리게 된 무오동지치성의 취지를 밝히며, 대한민국의 세계 종주국으로의 발전, 후천 선경 건설 등 천지공사의 실현을 확신하는 내용이 드러나 있다.
소자 불민하와 귀천하신 지 어언 칠십 년이 되도록 이렇다 할 효행을 받들지 못하옵던 차 (중략) 상제님 탄생지를 이제까지 타인이 영유하여 오던 바 금일 동지일 후에 소자의 명의로 확보하기로 하고 힘자라는 대로 아버님 탄강지를 성지화할 계획이오니 아울러 심고하나이다.29
이 심고문에는 상제님 강세지를 확보하여 성역화(聖域化)하겠다는 강석환의 염원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이러한 염원을 바탕으로 그는 1985년 「상제강세지 성역화사업취지문」을 배포하기도 했으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30 생가터 위치에 관해서는 “현재 위치한 우물 옆에 작은 오두막집이 있었다고 전해 들었고 그곳에서 증산이 탄강하였다고 한다”31라는 유정자(강석환의 처)의 증언과 “강 교장(강석환)이 436번지에 비석[유허비(遺墟碑)]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팔라고 했다”32라는 이웃 주민 전대식의 증언 그리고 “아버님(강석환)이 도전님께 생가터 436번지를 매입하시라고 권유했다는 사실을 종단 임원에게서 전해 들었다.”33라고 한 강희용(강석환의 장남)의 증언, “성기석 교감(도전님 기사)이 도전님으로부터 436번지가 생가터라는 말씀을 들었다”라는 문종욱 교감의 증언34 등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우리 종단에서는 436번지가 상제님의 생가터임을 확정하였다.

▲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지적도(1915)>36
강석환과 가까이 살던 마을주민은 그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강 교장은 마을 일에 세세하게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처세가 가볍지 않고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35라고 전하고 있다. 또한 강세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상제님 가문의 대를 이은 사람으로서 강석환은 상제님을 신앙하는 여러 교단 관계자들과 교류하였다. 그러한 교류 속에서 강석환은 많은 신앙인들의 존숭(尊崇)과 미혹을 한 몸에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상제님의 양자라는 위치가 세상 사람들의 떠받듦을 받을 수 있는 지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상제님께서 내려주신 가르침대로 신중하게 처신하고자 했으며, 상제님의 강세지를 성역화(聖域化)하고자 하는 의지와 바람으로 그것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를 볼 때, 강석환은 상제님 가문의 대를 이은 후손으로서 병풍의 글귀를 통해 전하신 상제님의 유언(遺言)을 마음에 잘 새기고 실천하려 노력했으며, 『전경』 초판(1974) 발간에 있어 의미 있는 공헌과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된다.
<참고 자료> 『전경』 초판(1974) 발간사 (『전경』 편찬위원회 대표, 강석환)

01 『진주 강씨 대동보(大同譜)』 24권, p.304 참고. 02 437-1번지에 살던 주민 전대식(1940년생) 인터뷰(2019. 9. 13). 03 교운 1장 43절. 04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83): 강성회에게 병풍을 전하심」, 《대순회보》 147호 (2013) p.19 참고. 05 강성회의 집은 상제님의 본댁(436번지)과 마주한 412-1번지다. (조선 총독부 발간 지적도<1915>) 06 취재부, 「증산대성의 양자 강석환(姜石幻) 씨 선화」, 『월간 천지공사』 51호 (충남: 범증산교연구원, 1993), p.28 참고. 07 행록 1장 15절. 08 강기중(1842년생), 강성회(1859년생), 강연회(1873년생), 강기회(1878년생), 『진주 강씨 대동보(大同譜)』 24권, pp.304-305. 09 취재부, 앞의 글, p.28. 10 『진주 강씨 대동보(大同譜)』 24권, p.406. 11 취재부, 앞의 글, p.28 참고. 12 강석환은 상제님의 후사(後嗣)를 위해 입양되었기에 『전경』에는 그가 태어난 해에 입양된 것으로 기록되었다고 보인다. 호적에 사후(死後) 입양으로 호주상속이 이루어진 시기는 1973년 5월 1일이며, 병풍이 전해진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13 435-1번지에 살던 주민 김동일(1947년생) 인터뷰 (2024. 5. 27). 14 1980년대 대순진리회 교무부장과 여주수도장 소장을 역임한 이순범(이학녕) 실장은 1956년 태극도에 입도하여 호장을 역임하였으며, 도전님께서 태극도에서 이궁하신 이후 도전님을 보좌하였다. 박상규, 「무극도 관련 문헌 연구: 비교 및 고증을 중심으로」, 『대순사상논총』 22집 (2014), p.45 참고. 15 이순범 실장 인터뷰(2011. 6. 16). 16 강석환의 장남 강희용(1949년생) 인터뷰 (2019. 10. 21). 17 『대순전경』 3판(1947), 『중화경』(1955), 『용화전경』(1972) 등 18 박상규, 앞의 글, p.45 참고. 19 강희용 인터뷰 (2019. 10. 21). 20 2000년대 초 총무부 차장을 역임한 문종욱 교감 인터뷰 (2019. 9. 17). 21 같은 인터뷰. 22 고남식, 「『전경』 「행록」편 연구」, 『대순사상논총』 32집 (2019), pp.47~53 참고. 23 강희용 인터뷰 (2024. 9. 14). 24 강희용 인터뷰 (2019. 10. 21). 25 김동일 인터뷰 (2024. 5. 27). 26 이는 1978년 강석환이 작성한 것으로, 유족들이 강석환의 유품을 정리하던 가운데 발견되었다. 27 국한문 혼용체를 한글전용으로 옮김, 강석환, 「무오동지치성 심고문」 (1978), p.1. 28 강석환, 앞의 글, p.4. 29 강석환, 같은 글, p.17. 30 취재부, 앞의 글, p.28. 31 박인규, 「증산 강일순 생가터의 고증과 종교문화적 의의」, 『종교와 문화』 36 (2019), p.16. 32 전대식 인터뷰(2019. 9. 23). 33 강희용 인터뷰(2019. 10. 21). 34 문종욱 교감 인터뷰(2019. 9. 17), 문종욱 교감은 2016년 상제님 생가터 매입 실무를 담당하였다. 35 전대식 인터뷰(2019. 9. 23). 36 위 지적도는 조선총독부 지적도(1915)를 참고하여 작성한 것이다. 433-1번지의 소유주가 상제님 부친인 ‘강문회’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은 본댁이 너무 협착하여 나중에 김성연 종도가 사드린 집(433-1번지)으로 이사를 한 까닭이다. 박인규, 앞의 글, pp.1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