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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4년(2024)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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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 공모전 : 나의 해원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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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 : 산문 우수


나의  해원일지



금사3 방면 교령 위수미




타오르는 나의 분노,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포덕소에서 입도식이 있는 날이었다. 규모를 크게 모시니 준비하는 음식도 많아 일손도 여럿 필요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음식 준비부터 청소까지 마무리를 짓고, 음복까지 하고 나니 피곤했다. 그래도 정성 들였다는 마음에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낸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감사하게도 임원께서 음복을 여러 봉지에 싸주셔서 지인들에게 나눠주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과 늦은 저녁을 음복으로 먹으면 되겠다고 얘기를 나눴다.
  집으로 가다가 근처에 있는 후각에게 따로 음복을 챙겨주기 위해 종이봉투를 챙겼다. 그동안 남편은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건은 돌아온 사이에 발생했다. 차에 있었던 그 많은 양의 음복이 그 짧은 시간에 사라져버렸다. 당황한 나는 놀란 토끼 눈으로 남편에게 음복이 어디 갔냐고 물었다.
  “좀 전에 차 옆을 지나가던 사람 한 명에게 다 줬어.”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지인들에게 나눠주려고 했는데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묻지도 않고 얼굴만 아는 사람에게 그 많은 음복을 다 줘버렸어요?”
  남편은 음복이니 그냥 나눠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무심하게 말했다.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차 안에서 나와 남편의 말이 오고 가면서 결국 큰 말다툼이 되어 버렸다. 남편은 마지못해 사과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다. 당시 남편의 증언에 의하면 살면서 매의 눈을 처음 봤다는 것이다. 내 눈은 매의 눈으로 되어 있었고, 헐크와 같이 입고 있던 옷을 찢어버릴 정도로 내 감정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분노가 진정되고 평정심을 되찾기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다. 감정은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미움과 원망하는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남편도 이런 나의 모습에 불편했는지 안부를 묻는 전화를 했다. 남편의 전화번호를 보는 순간 진정된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그냥 연락을 무시한 채 일에만 몰두했다. 남편은 불안했는지, 부재중 전화가 화면에 가득했다. 속으로 ‘내가 고통을 겪었으니 당신도 고통을 겪어야 해! 쌤통이다!’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나마 일을 하다 보니 남편과의 일은 잊을 수 있었다. 바쁜 일과를 마무리할 때쯤 문득 남편을 인생의 원수같이 느끼고 있고, 내 마음에서 밀어내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실수에 내 마음이 크게 반응하는 것이 나의 지각을 넘어섰고, 내 인식 밖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는 미안하다는 말에 바로 마음이 풀렸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 뒤끝이 오래 가는 내 마음을 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남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남편을 대하는 내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남편은 나를 우선으로 배려해주고 챙겨주는 자상한 사람이다. 나보다 남을 먼저 챙기는 사람도 아니었고, 자기의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고 나를 위한 배려를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 성품을 비춰 보면 나와 충분히 음복했기 때문에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주고 싶은 위대한 인류애(?)의 마음으로 내게 허락을 구할 생각은 깜박했을 것이다.
  내 생각은 달랐다. 내가 의미를 두고 정성을 들인 음복을 나와 가족들을 우선으로 챙겨야지! 이것이 옳고 상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내 상식을 벗어났다고 생각한 나는 내 기준으로 남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고 언행을 비난했다. 그때 남편은 화내는 내 모습이 자기 것을 뺏겨 화가 나 있는 어린애처럼 자기중심적인 사람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 당시에는 잘못한 사람이 도리어 나를 더 비난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 사람 뭐 이렇게 눈치가 없어’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 차분히 생각해보니 남편의 말이 맞았다. 내 안에 화내고 있는 내면 아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내성적이고 말수도 없는 성격이셨다. 마을 이장을 20년 동안 하면서 주민들에게 선한 언행과 덕망이 높으신 편이셨다. 항상 가족보다 남을 먼저 챙기고 배려했다. 하지만 고된 농사일을 마치면 거의 매일 다음날 기억이 없을 때까지 술을 드셨다. 그러면 인자한 아버지는 인격이 다른 폭군으로 변해 집안을 늘 공포로 만드셨다. 온전한 정신일 때는 주변 사람에게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는데,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술 때문에 다른 인격을 지닌 아버지로 바뀌는 것이다.



  다른 몸서리쳐지는 장면도 떠올랐다. 10살 때 술에 취한 아버지가 마을에 내려가 술을 사 오라고 하셨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산속에 있었는데, 혼자 내려갔다가 한밤중에 길을 잃어 공포감에 밤새 울었던 적도 있었다. 언제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전쟁통 같은 집안 분위기에서 몸과 마음은 피폐해져 신경쇠약과 가위눌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사춘기 시절,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이런 과정도 도를 만나기에 필요한 나의 환경이었을 것이라고 의미 부여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인생을 고민하게 되었고 선각의 교화가 마음에 와닿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버지로부터 받은 트라우마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나게 되었다.



내 마음의 소리를 가만히 귀 기울여 보다


  남을 먼저 챙기지만, 가족에게는 무관심한 아버지에 대한 잔영이 남아서일까? 남편이 나보다 남을 더 챙기는 듯한 행동이 보이니 화가 났다. 순간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싫어하고 밀어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 감정적 기준에서 남편을 분별하려는 태도가 있는 한 이 사람과 내가 원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남편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에 관한 생각이 문제였다.
  남편과의 사건은 나에게 도대체 알 수 없는 나 자신의 감정과 대면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감정을 찬찬히 이해하기 위해 낯설고 불편한 내 생각을 향해 감각을 세우며, 내 마음의 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처음에는 내면에 숨어 있던 ‘것’이 조금 드러나면서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다. 다음에는 다양한 경험 속에서 이런 ‘것’이 숨어 있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것’이 나의 믿음을 만들었고 그 믿음이 기준이 되어 세상을 분별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는 남편에게 느낀 감정이 배신감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화가 났던 것이다. 나와 가족을 사랑해주지 않고 상처만 주고 타인에게는 호의를 베푸는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낀 것 같이! 남편의 행동이 아버지를 소환시켰고 그 배신감이 투영되어 분노로 폭발한 것이다.
  내 생각을 내려놓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내 생각이 옳고 상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려놓기 어려웠다. 나를 지켜주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결핍으로 작용했다. 그러니 내 것부터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이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내면에 깔려 있으니 남편을 나의 척도에 맞추려는 의지가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친밀하고 가까운 가족이나 부부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있어서는 감정이 더 크게 일어나기 때문에 다른 인간관계보다 더 크게 많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나의 결핍을 채워주기를 기대하고 결핍을 지닌 채로 세상을 바라보면 나는 늘 피해자로 설정되어 있다. 내 손가락이 아프면 상대방의 큰 고통이 보이지 않듯이 나의 결핍 때문에 남의 처지가 보이지 않고 남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는다. 나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은 좋다고 여겨 마음에서 끌어당기고 나의 결핍과 관련된 것은 싫다고 여겨 마음에서 밀쳐내고 싶어진다.
  분별이란 호오(好惡: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와 미추(美醜: 아름답고 추한 것)와 같은 ‘이차적’ 관념이 덧붙여진 구별이나 판단, 인식이다. 좋아서 가지려는 탐심(貪心)과 싫어서 멀리하려는 진심(瞋心), 모두 나의 결핍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남을 분별하려는 데서 탐심과 진심의 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 나의 경험을 넘어서게 되고, 내가 옳다는 믿음을 넘어서고 분별하는 자신을 넘어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보고 그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관찰자 시점으로 본다는 것은 내 인식이나 이해 혹은 의지의 바깥에 있는 것을 관조해본다는 것이다. 감정에 치우쳐 있는 나의 관점에서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지만, 남편이 나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주듯이 말이다. 순간 황당하게도 ‘남편이 남의 편인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 사람이 나보다 타인을 더 우선시하는 모습이 보이면 상처받고 그 관계를 단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과 사건에 따라 그때마다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문제의 본질은 같았다. 내가 상처받을까 봐 내가 먼저 피하거나 밀어냈다. 나는 내 기준에 맞으면 끌어당기고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밀어내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의 빈자리를 누구한테든 채우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접할 때 그것을 거부하고 밀쳐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어 그것을 이해하려고 귀 기울이는 것이다. 상황에 맞지 않게 과한 나의 언행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유심히 살피려 했고 결국 내 안에 배신감이라는 부정적 관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파악하게 된 것이다. 알고 나니 명료해졌고 이해되었다. 이렇게 내가 나를 이해하게 되니 남편도 그 감정에 공감해 주었다. 남편은 자기라도 충분히 화가 날 일이라며 이해해주고 미안하다고 해주었다. 내가 나를 이해하니 남편도 남의 편이 아니라 내 편이 되는, 내가 늘 바라고 바라던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자식은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본능적 욕구를 반드시 채워야 하는데 그 본능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마음에 구멍이 생기고 그것은 결핍이 된다. 그 결핍은 누구한테든 반드시 채우려고 노력한다. 내 안에 자리 잡은 결핍으로 인해 나의 언행이 문제가 된 것이다. 과거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미움과 원망하는 마음으로 자라나게 되어 사랑을 채우기 위한 욕구로 발동된 것이다. 욕망과 감정에 치우친 발동은 허물을 짓게 되어 실망과 후회를 남기고 남도 원망하게 되어 수도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제삼자의 관찰자 시점에서 자신의 허물을 관찰하다


  나도 모르는 무의식에 덮여 있는 욕망과 감정을 인지하기 위해 자신의 인지과정을 한 차원 높은 과정에서 발견해보는 것이다. 결핍과 분노로 차 있었던 나 자신을 차분하고 냉철한 마음을 가진 내가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보니 자신의 허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볼 수 있었다. 남편은 이렇게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메타인지라고 말해주었다. 분별심을 내려놓는 방법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자신의 허물을 관찰하기 위해 메타인지라는 방법을 잘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타인지에서 중요한 방법은 제삼자의 관찰자 시점에서 자신에게 질문을 반복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과정은 자기 생각과 감정, 그리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로운 판단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숙고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아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것인가,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들이 과연 모두 맞는 것인가에 대해 나 자신에게 물음을 가지는 것은 자기반성을 올바르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를 반성하여 보지 않고 불만과 불평을 감정화하여 고집한다면 스스로 상극을 조장하는 것이다.”(『대순지침』 p.92)
  남편과 나는 앞으로 서로 의견대립이 있고 자기감정만 주장할 때는 멈추고 이 구절을 읽고 각자 숙고하는 시간을 갖고 대화하기로 했다.
  부부란 서로의 욕구와 욕망, 그리고 감정이 극대화되는 관계인 것 같다. 혼자 있으면 덮고 지나가는 것들을 아주 크게 드러나게 해주는 환경이기도 했다가, 때론 냉철한 조언도 해주는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은 나한테 명당이다. 내가 아플 땐 보호자이기도 하고 힘들 땐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남편이기도 했다가 나의 수다를 다 들어주는 절친이고 도우인 내 편이다. 나도 그 사람에게 명당이 되기 위해 일상 자신을 반성하여 과부족이 없는가를 살펴 고쳐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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