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는 미래를 위한 나의 전진이다
교무부 김태윤
우리는 수도하는 도인이다. 수도는 도를 닦는다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닦는다[修]는 표현은 대상을 깨끗이 하거나 돌이나 자갈을 제거해 반반하게 길을 만들 때 사용된다. 사람에 대해서 ‘닦는다’라고 쓸 때는 훌륭한 인격을 갖추려고 품행이나 도덕을 바르게 다스려 기른다는 의미를 지닌다. 학문을 닦는다는 수학(修學)이 학문을 통해 자신에게 부족한 지식을 배운다고 이해되듯이 수도는 도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고쳐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더 나은 상태로 만든다’라는 것은 자신을 바꿔보고 싶다는 변화 의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더 나은 상태는 자신이 바꿔보고 싶은 상태이며 자신이 지향하는 목적과 연결된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 방법을 찾아 목적을 이룰 때까지 끊임없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렇게 보면 닦는다는 것은 목적 달성을 위해 현재 지닌 문제를 극복해 가는 과정이기에 미래지향적 변화 의지가 담긴 실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는 경계이다. 만약 우리가 과거의 생각에만 머물러있다면 현재는 과거의 연장일 뿐이다. 현재 속에서 반복되는 과거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미래 역시 과거가 반복되는 삶으로 지속되는 것이다. 도인도 마찬가지이다. 수도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부족한 점을 다스리기 위해 수도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과거의 생각에 머물러있을 때가 많다. 그렇지만 과거의 나에게 만족하지 않고 보다 나은 내가 되겠다는 목적을 세울 때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과거와의 균열이 시작된다. 현재의 자신을 바꾸고 싶은 변화 의지가 꿈틀거리고 과거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던 어제의 사소한 사건이 큰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사건을 바라보는 인식이 바뀜에 따라 사건의 성격도 달라지며 일상의 사건들은 나에게 의미를 주는 사건이 된다. 이렇게 자신을 변화시키겠다는 목적의식은 인식의 변화,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수도에서 나의 변화 의지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상제님께서는 선천의 문제점이 상극에 있다고 진단하시고 상극을 없애 상생이 펼쳐지는 후천 선경을 이루기 위해 천지공사를 보셨다. 상제님께서 단행하신 천지공사는 선천의 원(冤)을 양산한 상극을 뜯어고쳐 상생의 도수로 펼쳐나갈 것이라는 점에서 미래지향적 성격을 지닌다. 우리는 진멸지경에 빠진 천하를 구하겠다는 상제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수도에 동참했고 선천의 반복이 아닌 극복으로서의 후천을 지향하기 위해 수도에 뜻을 둔 것이다. 인류는 자기 이익을 위해 상극을 조장하고 증폭시키며 문명을 공멸(共滅)적 위기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마치 내가 가는 길에 낭떠러지가 있는데도 그 앞에 있는 달콤한 열매에 눈이 팔려 발밑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다. 상제님께서 지금의 세태를 진멸지경으로 표현하신 것은 세상 사람들이 어떤 길로 가고 있는지 경고하신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상극으로 점철된 선천의 문제를 느껴 해원상생(解冤相生)의 길로 가야만 한다고 촉구하신 것이다. 우리는 선천의 상극을 극복하고 상생이 펼쳐지는 후천 선경으로 가기 위해 수도하고 있다. 도전님께서는 “수도는 항상 석암향명(昔暗向明)의 길임을 명심해 나가야 합니다.”01라고 말씀하셨다. 어둠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 상태라면 밝음은 드러나 보이는 상태이다. 어둠은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을 숨기고 있는 허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둠이 욕심에 의해 양심이 가려진 상태라면 밝음은 허물을 고쳐 양심을 회복한 상태이다. 석암향명은 어제의 어둠에서 밝은 내일로 향하는 것으로 지난날의 허물을 고쳐 올바른 길로 갈 것을 가리킨다. 밝은 것을 향한다는 것은 자신이 저질렀던 과거의 허물을 드러내는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허물을 드러낸다는 것은 허물을 인식해 없애겠다는 자기반성이다. 과거의 어둠을 뒤로하고 밝음을 향할 때 과거를 극복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자기 욕심에 빠져서 나와 다른 사람을 속이는 부정직한 삶을 계속 살아간다면 과거의 어둠을 계속 반복할 뿐이다. 이제 양심 회복을 위해 과거의 어둠을 드러내어 뉘우칠 때 밝음을 지향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과거의 어둠에서 미래의 밝음으로 나가야 한다. 거울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밝게 비춘다. 거울에 때가 묻으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없다. 거울에 먼지가 쌓이면 사물을 제대로 비추지 못하듯이 인간도 사물을 접할 때 물욕이 끼면 사물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다. “내 마음을 거울과 같이 닦아서 진실하고 정직한 인간의 본질을 회복했을 때 도통에 이른다.”02라고 한 것도 허물로 인해 인간의 본질이 가려지기에 항상 자신의 마음을 살펴 인간의 본질이 그대로 밝게 드러날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먼지가 쌓인 거울을 닦는 나의 행위는 새로운 미래를 향하게 만든다. 이러한 실천은 과거의 어둠에서 벗어나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도전님께서는 “수도는 미래를 위한 나의 전진이니 무자기를 옥조로 하므로 날조가 있을 수 없습니다.”03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수도의 성격을 밝혀주셨다. ‘미래를 위한 나의 전진’은 비록 지금의 상극적인 현실이 힘들고 고단하지만, 수도의 목적인 도통을 위해 무자기(無自欺)의 자세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도의 이치에 맞는 마음이 도심(道心)이면 자기 이익을 먼저 앞세우려는 마음은 사심(私心)이 된다. 사람은 견물생심이 있어 자연스럽게 물욕이 발동한다. 이러한 마음은 인간이 지닌 사적인 마음으로서의 인심(人心)에 해당한다. 도심은 자기 이익만을 먼저 앞세우기보다 이치와 경위에 합당한 공적인 마음을 가리킨다. “사(私)는 인심이요, 공(公)은 도심(道心)”04이 된다는 점에서 이치와 경위에 맞게 실천할 때 나의 행위는 공적 행위가 되며 마음은 사적인 물욕이 배제된 도심이 된다. 수도 과정에서 유혹이 늘 우리를 따라다닌다. 도인 역시 인간이다 보니 상대가 나를 칭찬하는 소리에 상대를 너그럽게 이해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나를 비판하는 소리에 감정이 상해 상대에 대한 왜곡된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말과 행위에 마음이 가는 것이 사적인 마음으로서 인심이라면 공동체에 타당한 말과 행위에 마음을 두면 공적인 마음으로서 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적이고 올바른 가치를 지향할 것인지, 마음을 속여 자기 이익을 취할 것인지에 관한 결정은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평상시 들었던 교화는 무엇이 올바른 가치이며 자신이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지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기 이익에 어두워 양심을 속인 내가 아닌, 상생의 가치를 밝히기 위해 마음을 속이지 않는 내가 되기 위해 수도한다. 현재보다 발전된 미래를 위해 수도하는데 이 과정에서 마음을 속이지 않는 무자기가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수도가 힘든 것은 자기 이익과 올바른 가치 사이에서 스스로 결정하고 과거의 자기 허물을 고쳐 보다 나은 미래를 지향해 계속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자신이 도심과 사심의 경계에서 어디에 발을 두고 있는지 살펴보자. 수도는 지금은 힘들고 고단하지만, 현재보다 더 나은 상생이 펼쳐지는 미래로 나아가는 나의 발걸음이다. 수도는 미래를 위한 나의 전진이다.
01 「도전님 훈시」 (1985. 4. 13). 02 『대순지침』, p.38. 03 「도전님 훈시」 (1985. 4. 13). 04 『대순지침』, p.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