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제1봉, 신선봉
교무부 조규제
▲ 금강산대순진리회토성수련도장과 신선봉 (2016년 1월 촬영)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예로부터 금강산은 우리나라 제일의 명산이라 불려 왔다. 금강산이 명산인 것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에 끌려 찾아오는 유랑객들의 역사 또한 한몫했는데 19세기까지만 해도 누구나 죽기 전에 한 번은 가보기를 소원했던 산이었다. 상제님께서 도통군자의 출현을 위해 공사를 행하셨던 금강산!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 중에서 제1봉은 신선봉으로 알려져 있다. 신선봉은 미시령 고개 북쪽인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과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걸쳐 있다. 신선봉은 예로부터 신선이 살만 한 곳이라 하여 영험한 산으로 여겼다고 한다.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에 참배 갈 때마다 안내 초소 앞에 서서 신선봉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돌아오곤 했었다.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에서 멀리 바라만 보던 금강산 신선봉을 직접 답사해 보기로 하였다.
▲ 등산지도(출처: 네이버지도 위에 추가 표기)
신선봉에 오르기 위해 전날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에서 1박을 하고 새벽에 일찍 화암사(禾巖寺) 주차장으로 출발하였다. 우리의 산행은 수바위를 지나 신선대, 그리고 상봉을 넘어서 신선봉에 오르는 일정이다. 새벽 5시에 화암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일주문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니 수바위로 올라가는 이정표가 나왔다. 등산로를 따라 100여 미터를 오르니 수바위가 보였다. 집채만 한 바위, 그 앞에 서니 엄청나게 크게 느껴진다. 수바위 정상에는 항상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가 있다. 옛날에는 가뭄이 들 때면 그 물을 떠서 사방에 뿌리고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물웅덩이가 보고 싶었지만 강한 바람에 몸이 휘청거려서 오를 수 없었다.
▲ 화암사 수바위 (대) 수바위 (2016년 1월 촬영) (소) 수바위 (2024년 6월 촬영)
수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화암사에 어렵게 끼니를 해결하며 수행하는 두 스님이 있었다. 어느 날 두 스님의 꿈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서 수바위에 조그만 구멍이 있는데 그곳을 지팡이로 세 번 흔들어 보라고 하였다. 다음날 같은 꿈을 꾼 두 스님은 수바위로 달려가서 꿈속에서 노인이 일러 준 대로 해보았더니 두 사람 분량의 쌀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부터 두 스님은 양식 걱정 없이 수행에만 정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화암사에 한 객승(客僧)이 찾아왔다. 수바위에서 쌀이 나온다는 얘기를 들은 객승은 세 번 흔들어서 두 사람 분의 쌀이 나온다면 여섯 번을 흔들면 네 사람 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객승은 다음날 일찍 수바위로 달려가서 지팡이로 여섯 번을 흔들었더니 구멍에서 쌀은 안 나오고 피가 나왔다. 그때부터 수바위에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01
▲ 시루떡바위 (2024년 6월)
수바위를 지나 산을 오르다 보니 특이한 형상의 커다란 바위가 보였다. 안내판의 설명을 보니 모양이 시루떡을 쌓은 것처럼 생겼다 하여 ‘시루떡바위’라 부른다고 적혀 있었다. 이 바위도 조금 전에 보았던 쌀이 나왔던 ‘수바위’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쌀과 관련하여 ‘시루떡바위’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흥미로웠다. 시루떡바위를 지나 산길을 올라 ‘화암사 숲길 전망바위’에 도착했다. 전망바위까지 오르니 미시령 쪽에서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전망바위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상봉(1244m)이고, 왼쪽으로 300여 미터를 가면 신선대(645m)다. 전망바위에서 왼쪽으로 능선을 따라가니 100여 평의 넓은 바위 지대가 있었고 그곳을 지나 소나무 사이로 난 숲길을 조금 더 가니 바위가 마당처럼 넓게 드러난 신선대가 보였다. 신선대는 하늘의 신선들이 내려와 거닐었다고도 하고, 신선들이 내려와 노닐 만큼 풍광이 뛰어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신선대 건너편에 보이는 울산바위에 시선을 빼앗겼다.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보이는 울산바위의 위용에 ‘와’라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선대를 울산바위를 조망하는 포인트라고 하는가 보다. 바람에 날아갈 것만 같아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강풍이 불었는데 머리 위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바람을 타며 놀고 있었다. 신선대 주변을 둘러보고 상봉으로 가기 위해 되돌아 나오며 낙타봉을 카메라에 담는다. 큰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는 그 모양이 마치 낙타 등에 솟아 있는 쌍봉처럼 생겼다. 신선대에서 상봉으로 향했다. 이 구간은 초보인 우리에게 예상한 것 이상의 난코스였다. 가파르기도 하고, 뾰족하게 바닥에서 솟아오른 바위가 많아 걸음을 힘들게 했다. 그리고 마치 거인들이 거대한 바위를 마구 던져 놓은 듯 쌓여 있는 너덜바위 지대가 나와서 바위 사이를 건너뛰며 길을 찾아야만 했다. 올라가는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등산객들이 길을 찾도록 걸어놓은 리본을 찾아가며 바위 지대를 지나서 샘터에 도착한 후 잠깐 휴식을 취했다. 이곳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샘터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세숫대야만 한 웅덩이에는 낙엽이 쌓여 있었고 물이 나오는 파이프는 그 속에 잠겨 있었다. 가지고 온 물이 바닥나서 만약을 대비해서 물을 받으려고 하니 일행은 그 물은 먹을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럼에도 한 병을 받았다. 샘터를 떠나 너덜바위와 암반 지대를 한 번씩 더 지나고 나서 상봉에 도착했다.
▲ 상봉 (2024년 6월)
상봉에는 주변의 돌을 모아 사람의 키 높이로 돌을 쌓아놓았는데 그 중간에 페인트로 ‘상봉’이라고 써 놓았다. 상봉에서는 신선대와는 달리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상봉에 서니 속초 시내와 동해가 한눈에 보였다.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을 찾아보았으나 안개 때문인지 흐릿해서 위치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신선봉으로 가기 위해서는 상봉과 신선봉 사이에 있는 고개인 화암재를 지나야 했다. 상봉에서 화암재까지는 700m 거리지만 5~6m 높이의 암벽 구간을 두 번이나 내려가야 하는 험한 길이었다. 암벽 구간에 도착해서 신선봉을 바라보니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로프를 의지하며 내려가야 하는 암벽 구간을 두 번 통과하고 다시 한 번의 너덜바위 지대를 더 지나서야 화암재에 도착했다. 화암재는 교차로와 같은 길목이다. 상봉에서 오던 길로 곧장 직진해서 올라가면 신선봉이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화암사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왼쪽으로 내려가면 용대리 마장터02로 내려가는 길인데 지금은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 상봉에서 바라본 신선봉(2024년 6월)
▲ 신선봉 정상 모습 (2024년 6월)
화암재에서 신선봉까지는 600m 정도의 거리다. 화암재에서 신선봉에 오르는 구간은 급경사는 아니었지만 돌이 많아서 발밑을 조심하며 걸어야 했다. 숲길을 지나서 거의 신선봉 근처에 다다랐을 즈음에 너덜바위 지대가 또 나왔다. 너덜바위 지대를 넘으려 하다가 왼쪽으로 난 숲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신선봉 정상에 거대한 돌들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정상을 보니 지쳤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신선봉은 사람보다 몇 배나 큰 바위들이 쌓여서 이루어진 봉우리였다. 봉우리 가운데 제일 높은 곳에 테이블처럼 각이 진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앞쪽에 ‘신선봉’이라 새겨진 표지석이 붙어 있었다. 신선봉 주변에는 죽순처럼 바위들이 하늘을 향해 삐죽삐죽 날카롭게 솟아올라 있었다.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이 금강산을 불꽃처럼 날카롭게 그린 이유를 알겠다. 신선봉과 주변의 모습처럼 뾰족하고 높은 절벽과 돌무더기, 암석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를 풍수학에서는 화형(火形)의 산이라 한다.03 산봉우리가 마치 불꽃과 같이 활활 타오르는 첨예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그 기운이 맑고 밝으면 종교와 관련된 인물이나, 선각자, 예술가 등의 출중한 인물이 나온다고 한다.04 신선봉 정상에 서니 한눈에 보이는 속초 시내와 동해 바다 그리고 낮게 내려앉은 구름이 한데 어울려 장관을 이루었다. 이런 멋진 경치에 반해서 신선이 떠나지 못했을 것 같다. 옛날 금강산을 답사한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감상을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망설였다고 하였는데 그 말에 공감이 갔다. 신선봉에 올라서 바라보는 풍광 또한 우와~, 좋다, 장관이다 등의 말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올라오느라 지치고 힘들었던 몸이 상쾌해졌다.
▲ 신선봉 정상과 표지석(2024년 6월)
▲ 가장 높이 보이는 봉우리가 신선봉 (2024년 6월)
신선봉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붙어 있던 표지석이 눈에 띄었다. 거기에는 ‘신선봉 1,204m’라고 적혀 있었다. 표지석은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아래쪽 부분이 비바람 때문인지 깨져 있었다. 1,204m와 관련해서는 방면에서 교화를 많이 들었는데 숫자의 일부가 깨져 있어서 안타까웠다.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은 어디 있을까? 저 멀리 뿌연 안개 사이로 어렴풋이 도장이 보였다. 상제님께서는 “도는 장차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응기하여 일만 이천의 도통군자로 창성하리라.”05는 말씀을 비롯하여 금강산과 관련하여 공사를 행하신 바가 있다. 금강산의 맑은 정기는 제1봉인 신선봉으로부터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금강산은 대순진리회 도인들에게 아름다운 명산으로써의 차원을 넘어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산이다. 1994년 도전님께서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의 터를 이곳으로 정하신 이유 중의 하나는 상제님의 공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도인들은 이곳에서 상제님께서 대순하신 진리를 체득하기 위해 도전님께서 열어주신 연수를 행하고 있다. 너덜바위 지대를 건너고 절벽을 넘어서 신선봉에 오르는 산행은 ‘겁액을 극복하라’는 벽화에 적혀 있는 글귀를 생각나게 했다. 신선봉에 올라 저 멀리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수행해서 일만 이천의 도통군자가 창성하는 그날을 상상해 본다.
01 출처: 수바위 안내문 참고 02 말을 매매하던 장이 있었다고 해서 마장터라 한다. 옛날 관동 지방에서 서울로 갈 때 마장터에서 말을 빌리거나 사기도 하고, 서울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다시 말을 팔기도 했다고 한다. 03 풍수학에서는 산의 형상을 그 모양에 따라 목(木)ㆍ화(火)ㆍ토(土)ㆍ금(金)ㆍ수(水)의 오행으로 구분한다. 이것을 오행산(五行山) 또는 오성산(五星山)이라고 한다. 풍수 고서인 『감룡경(撼龍經)』에는 화성(火性)의 기운을 띠고 있는 산체(山體)를 염정[廉貞, 염정은 북두칠성 중 하나로 오행으로는 화(火)에 해당한다.]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염정을 어찌 독화라 하는가? 이 별의 형체를 얻으면 가장 높고 크다. 높은 산 정상에 바위들이 높게 우뚝 솟아 있고, 우산을 접은 것처럼 골이 지고, 정상은 헤진 실처럼 깨져 있다. 다만 뾰족한 불길이 하늘까지 치솟는 모습인 까닭에 그 성정이 타오르는 불처럼 뜨겁다고 해서 화성이라 부르는 것이다.(廉貞如何號獨火, 此星得形最高大. 高山頂上石嵯峨, 傘摺犁頭裂絲破. 只緣尖焰聳天庭, 其性炎炎號火星.)”, 양균송, 『감룡경ㆍ의룡경』, 김두규 옮김 (서울: 비봉출판사, 2009), p.92, 04 신영대, 「풍수 형기론으로 본 대순진리회 금강산 토성수련도장」, 『대순사상논총』 36집, (2020), p.44 참조. 05 예시 4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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