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순문예 : 산문 장려
감정은 고통이자 축복이다
금사1 방면 선무 정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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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기에 앞서 돌이켜보면, 내가 입도한 이유는 인존사상 때문이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하는 것, 사람 자체가 존귀하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 감히 그 무게를 알지 못하던 때였으나, 나는 지금 세상이 그러지 못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앞으로의 세상에 인존시대가 오길 바라며 부푼 마음으로 입도했다. 그럼에도 초심을 잊고 10년이 지나도록, 계속해서 척을 짓고 살아왔다. 나는 늘 윗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내가 바라보는 윗사람들은 ‘권위는 없으면서, 아랫사람들은 살피지 않고 그저 나이와 직위로 누르며, 아랫사람의 의견을 묵살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다 그랬다. 절로 따르고 싶어지게 만드는 능력이나 인성과 언행도 없으면서 그리 하니, 나는 늘 반발하며 사사건건 윗사람들과 부딪쳤다. 입도 초기,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는 선각이 내 충전기를 양해도 구하지 않고 가져가 쓴 적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급해서 그랬고, 포덕소에서 같이 지내고 있다 보니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내가 이해해 주리라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화를 내고 따졌다. 내가 윗사람이었으면 그렇게 함부로 했을까? 아랫사람이니 저렇게 막 대하는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학원에서 강사를 하던 시절, 어느 학원 원장은 매일 수업 시간에 본인이 돈 많은 것을 어필하며 학생들에게 자랑했다. 그러면서 학원생이 친구를 학원에 등록했을 때 주는 보상도 제대로 주지 않았으며, 그 흔한 간식조차 사주지 않아 학생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학생들의 불만을 듣던 나는 보다 못해 이 부분을 원장에게 이야기했으나, 원장은 애들 말만 듣냐며 오히려 화를 냈다. 나는 애들한테 베풀지도 않을 거면서 애들을 붙잡고 왜 재산 자랑을 하고 있나 생각하며, 원장을 참 한심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원장을 보면 인사조차 하지 않고 그저 내 월급을 주는 통장 취급했다. 이런 숱한 경험을 통해 나는 단순히 윗사람들과 안 맞다고 생각했다. 어느 곳을 가든 이 패턴은 자꾸 반복됐으니까. 그러다 수도를 제대로 해보기로 마음먹고, 선각과 수도를 하면서 내가 왜 윗사람들과 사사건건 부딪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의 폭언과 폭력에 지속해서 노출된 까닭이었다. “너를 낳은 걸 제일 후회한다”, “너 낳고 미역국 안 먹길 잘했다”, “어쩌다 너 같은 게 태어나서는” 등의 말을 일상처럼 듣고 살았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펑펑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내 울타리가 되어줬어야 할 엄마는 끊임없이 내 존재를 부정했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인정받고자 부단히도 노력했다. 친척 하나 없는 데다, 설날과 추석에만 아빠가 집에 오는 상황에서 윗사람이라고는 엄마뿐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 두 분 다 학력이 전무하여 공부와 숙제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돈 걱정을 덜어드리려 고등학교 땐 급식 도우미로 일하며 식비를 일절 내지 않았고, 장학금 제도를 알아보고는 장학금까지 받아서 드렸다. 국립대학교를 갔는데 등록금도 전혀 내지 않았다. 심지어 장학금을 받아 학기마다 200~300만 원에 해당하는 돈을 가져다드렸다. 그때마다 돌아온 반응은“네가 자식이니 당연히 그래야지”, “가난한 집에서 대학에 다니려면 당연히 해야지” 등의 내 노력을 부정하는 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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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사람으로부터 내 존재가 짓밟힌 것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무의식에 깊게 자리 잡아 윗사람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이렇다 보니 나 또한 내가 당했던 것처럼 윗사람답지 않은 윗사람을 무시하고 짓밟았다. “윗사람도 아직은 불완전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이와 직위에 맞지 않는 언행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 사람이 그렇다 해서 내가 무시하고 깔아뭉갤 권리나 당위성이 없는 것이다.” 내가 윗사람들에게 반발하고 대들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지만, 내 피부엔 와 닿지 않았다. ‘윗사람이 윗사람답지 못하는데, 내가 왜 존중해줘야 하지? 존중이 전혀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데?’라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다 최근 이런 일이 있었다. 전날 거래처로부터 상사가 서류를 받았고 이 내용이 공유되지 않은 상태로 다음날 내가 처리하게 되었다. 이 거래처는 나와 주로 일을 처리하는 편이었기에, 나는 당연히 서류를 보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거래처에 연락했다. 그러자 윗사람이 왜 물어보지도 않고 일을 그런 식으로 하냐고 지적했다. 예전 같았다면 ‘내가 여기랑 대부분의 일 처리를 하는 걸 알 텐데, 먼저 이야기해 주면 되는 거 아닌가?’, ‘굳이 이런 걸 가지고 지적까지 할 필요 있나? 그냥 내가 받아뒀다 하고 나한테 주면 되지’라고 생각하며 기분 나빠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이런 내 생각이 옳다는 생각 때문에 그동안 이 사람을 살피지 못했구나 싶었다. 윗사람이면 아랫사람을 살피고, 아랫사람이 실수하면 감싸는 미덕을 보이는 게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사람은 본인이 윗사람이니 아랫사람인 내가 살피고 맞추기를 바랐을 텐데, 그러지 않으니 무시당한다고 생각해 왔던 것 같았다. 게다가 이 사람이 평소에 보여준 모습이 윗사람답지 않다 생각해 왔다 보니, 평상시에 지적받을 때도 사실은 죄송하지 않은데 상황을 무마하려 앵무새처럼 “죄송합니다”만 반복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런 나를 보며 윗사람이 얼마나 답답하고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싶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 사람에게 진심으로 미안해졌다. 하여 처음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하면서 스스로 다시 돌이켜보게 되었다. 윗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내가 윗사람들과 안 맞아서가 아니었다. 내 과거로부터 형성된, 윗사람에 대한 부정적 관점 때문에 윗사람들과 맞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윗사람의 모습과 기준이 따로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윗사람은 ‘책임을 지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지고,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며, 아랫사람들을 두루 살피고, 아랫사람들의 부족한 면을 너그럽게 감싸 안는 사람이 옳은 윗사람이라 여겼다. 이런 내 이상과 현실의 윗사람이 맞지 않자 분노하면서, 윗사람을 무시했다. 윗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 것이다. 이를 통해 스스로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나를 모르는 데서 이러한 문제들이 파생되는 것을 알았다. 모르는 게 죄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듯했다. 내가 나를 모르니, 나를 통제하지 못하고, 이에 따라 척을 짓고 있다는 게 불현듯 느껴지면서 머리를 맞은 듯했다. “마음을 속이지 말라”가 왜 훈회에서 가장 먼저인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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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대순지침』에서 “내 경위만 옳고 남의 주장을 무시하는 데서 반발을 일으켜 서로 미워하다가 마침내 원한을 품어 척을 맺는 법이다”라는 구절도 떠올랐다. 윗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는 내 사고 방식이, 윗사람을 부정하고 무시하면서 척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다시금 입도 당시를 떠올리면서, 인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상제님께서는 “천존과 지존보다 인존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라 하셨다. 이 말씀은 신명이 하늘에 머물렀던 천존시대[神封於天]와 신명이 땅에 머물렀던 지존시대[神封於地]가 있었으며, 이제는 신명을 사람에게 봉하는 인존시대[神封於人]가 도래할 것이라는 뜻이다. 천존과 지존시대에 존중받던 신명이 인간과 함께하게 됨으로써 인간이 존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존은 단순한 인권이나 인간존중을 넘어 천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존귀한 개념이다. 우리 도(道)에서 인존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을 신명과 조화(調化)가 가능한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인간과 신명은 마음을 통해 소통하여 조화한다. 상제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은 신의 중요한 용사기관이요 신이 출입하고 왕래하는 길이다. 추기를 개폐하고 문호를 출입하며 도로를 왕래함은 신이다. 혹은 선하기도 하고 혹은 악하기도 하니 선한 것은 스승으로 삼고 악한 것은 고쳐라. 내 마음의 추기와 문호와 도로는 천지보다도 크다(心也者鬼神之樞機也門戶也道路也 開閉樞機出入門戶往來道路神 或有善或有惡 善者師之惡者改之 吾心之樞機門戶道路大於天地).” (행록 3장 44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마음은 신명과 인간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마음의 상태에 따라 그와 상응하는 신명과의 감응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명과 마음으로 소통하는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되며, 신명과 인간은 상호 간의 교류 속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신명의 작용이 인간 행위에 영향을 미치며 또한 인간의 행위가 신명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기 때문이다.01 내가 윗사람들에게 분노했던 까닭을 돌이켜보면, 내 존재를 짓밟히고 부정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바꿔 말하면 나는 내 존재를 주장하고 인정받고 싶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건드리면 반발하고 무시하는 식으로 반응했다. 그렇지만 인존에 대해 다시 찾아보고, 생각하게 되면서 내가 귀한 만큼 남들도 귀하다는 것을 몸소 체감했다. 이들이 내게 악감정을 품은 이유도, 그들 존재를 주장하고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들 또한 나와 같은 ‘사람’이며, 천지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들이니까. 나만 상제님의 사람이 아니라, 이들 또한 상제님의 사람들이니까. 상제님의 뜻을 따른다는 도인이 인존을 실현하기는커녕 척을 짓고 있었다는 것에 매우 부끄러웠다. 그런 만큼 매 순간 나를 들여다보고 반성하여 상제님의 뜻을 실천하는 참된 도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나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윗사람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고 싶지 않다. 이들이 부족한 면모를 순간마다 보일지언정, 내가 이해하며 너그러이 포용하고 싶다. 그러다 훗날 내가 윗사람이 된다면, 내 대에서는 이런 일이 절대 되풀이되지 않게 하리라.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서, 아랫사람들을 존중하며 그들을 너그러이 감싸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렇게까지 나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이야기해 주는 선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보지 못하고, 기존에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인간관으로 윗사람을 바라보며 척을 지을 때마다 따끔하게 쓴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고마웠다. 당장은 바뀌지 않을지라도, 바뀌기를 바라고 믿은 그 마음도 감사했다. 그런 선각의 마음과 어제보단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아지고 싶은 내 마음이 상호작용하였기에 이렇듯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하게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다른 이유로는 내 과거를 다시 복기하며, 과거로부터 형성된 인식이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선각이 짚어주었기에 가능했는데, 지금껏 나는 드러나는 양상만 보고 윗사람들과 맞지 않다고만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그 생각으로 윗사람을 알아보고 맞춰보려는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척을 짓고 있는 상황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했던 것 같다. 내가 내 마음을 속인 것이다. 내가 하는 생각이 내 입장에선 당연하고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타인의 입장과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늘 간과하게 된다. 따라서 어떠한 감정이나 생각이 일어날 때, 표출하기보다는 일단 참은 후 내면을 먼저 들여다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오를 경계하기 위하여 예부터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自欺自棄)이요, 마음을 속이는 것은 신을 속임이다(心欺神棄).”라고 하였으니, 신을 속이는 것은 곧 하늘을 속임이 되는 것이니 어느 곳에 용납되겠는가 깊이 생각하라. (『대순지침』 p.42)
척을 짓는다는 것은 결국 마음을 속이는 데서 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해서 이 구절이 마음 깊이 와닿았다.
마음을 속이지 않는 데서 서로가 신뢰할 것이고, 언덕을 잘 가지므로 화목할 것이며, 척을 짓지 않는 데서 시비가 끊어질 것이고,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데서 배은망덕이 없을 것이며,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 이것이 우리 도의 인존사상이며 바로 평화사상인 것이다. (『대순지침』 p.43)
바로 옆 장에 나와 있는 구절이었는데, 도인으로서 지향해야 하는 바가 명확히 명시되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이 가장 우선이며, 그 결과로 나를 알고 타인을 알게 되어 경위에 맞는 언덕을 잘 가지게 되므로 화목하게 된다는 것이 보였다. 우리 도가 사람 공부라고 하는데, 여기서 사람은 타인도 해당하지만 나 또한 사람이기에, 나를 알아가는 것 역시 사람 공부일 것이다. 이것이 중찰인사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되니 내게 분노를 일으킨 윗사람들에 대해서도 고마움을 느꼈다.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있었기에 왜 이런 감정이 일어나는지 끊임없이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스럽고, 화가 나고, 억울하고, 슬픈 이 모든 감정이 나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감정은 인간에게 있어 고통이자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굳이 에너지를 써가며 생각을 거듭하고 자신을 들여다보겠는가. 비록 감정이 일어나 몸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해선 안 될 언행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지만, 그럼에도 감정을 직시하고 자기를 제대로 인식하여 바꿔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마치 바다가 가까이서 보면 끊임없이 요동쳐도, 멀리서 보이면 잔잔해 보이는 것처럼. 그러니 오늘도 내게 주어진 고통이자 축복인 감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기려 한다.
01 「인존(人尊)의 의미와 실현」, 《대순회보》 175호 (2015), pp.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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