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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지명 답사기 : 살포정과 승달산 호승예불혈 답사기

살포정과 승달산 호승예불혈 답사기

 

 

교무부 신상미

 

▲ 조산에서 촬영한 승달산 전경(2024년 9월 4일 드론 촬영)


또 하루는 상제께서 공우에게 “태인 살포정 뒤호승예불(胡僧禮佛)을 써 주리니 역군(役軍)을 먹일 만한 술을 많이 빚어 놓으라” 이르시니라. 공우가 이르신 대로 하니라. 그 후에 상제께서 “장사를 지내 주리라”고 말씀하시고 종도들과 함께 술을 잡수시고 글을 써서 불사르셨도다. 상제께서 “지금은 천지에 수기가 돌지 아니하여 묘를 써도 발음이 되지 않으리라. 이후에 수기가 돌 때에 땅 기운이 발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공사 3장 20절)

 

  『전경』에 ‘살포정’ 또는 ‘살포정 주막’이 등장한다.01 이곳은 주로 상제님께서 차윤경(행록 4장 22절)과 김경학(권지 2장 29절) 등 종도들을 만나기로 약속하는 곳이었다. 위의 공사 3장 20절에 ‘태인 살포정’ 뒤에 명당인 호승예불을 써준다고 하셨다. 그래서 사전 조사 후 살포정 마을 터 주변과 상제님께서 언급하신 호승예불혈 명당이 있는 전남 무안 승달산(僧達山)02을 답사하였다.
  『전경』 지명의 지역 주소는 시, 군, 구, 읍, 면, 동, 리의 형태로 대부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와 같이 맨 마지막에 하위 행정구역 단위인 리(里)가 붙는다. 그런데 ‘태인 살포정’을 비롯하여 ‘김제 오동정(梧桐亭)’,03 ‘정읍 노송정(老松亭)’04과 같이 ‘정(亭)’자를 붙여쓰기도 한다. ‘함안 반구정(伴鷗亭)’05과 ‘밀양 종남산 영성정(靈聖亭)’06 같은 경우는 정자(亭子)의 이름이지만, ‘살포정’과 ‘오동정’, ‘노송정’은 정자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여기에 쓰인 정(亭)은 동(洞)이나 리(里)와 같은 뜻인 마을을 나타내는 단위로 사용되었다.07 『한국지명총람』에 ‘살포정’이 ‘살포리’ 혹은 ‘사포리(沙浦里)’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마을을 의미한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08


[지도 1] 정읍과 태인의 경계선에 위치한 살포정 (출처: 1861년에 간행된 대동여지도)



   『한국지명총람』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보기 전에는 살포정이 마을에 있는 정자의 이름이라 생각했었다. 살포정이 정자가 아니라 ‘살포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서둘러 살포정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새벽 일찍 출발하였다.
  살포정09은 국도 1호선 태인과 정읍 간 우산교차로가 있는 정읍대로 일대와 주유소 인근 자리에 있었다. 살포정은 상제님 재세 시 고부군 장순면(張順面)이었다가 1914년 이후엔 정읍군 우순면(雨順面)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경』에 ‘태인 살포정’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이곳이 태인 생활권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도 1]의 〈대동여지도〉는 1895년 이전 태인현, 정읍현, 고부현의 경계가 나오는데 살포정은 이 세 곳이 접하는 지역이다. 1910년 지도인 [지도 4]를 보면 살포정은 정읍과 태인을 오가는 길목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살포정이 정읍과 태인의 경계선에 있었지만, 산을 넘어서 가야 하는 정읍보다 평지로 이어진 태인 쪽이 더 접근성이 좋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태인 살포정’이라 불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을 사람의 인터뷰에 의하면 옛날에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모래가 많은 포구라고 하여 ‘사포(沙浦)’ 또는 ‘사포정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살포정 마을이 없어진 시기를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간척사업으로 강은 천으로 바뀌고 주변은 농지가 되었다.10 전에 살포정과 주막터(우산리 147번지)를 처음 답사했을 때는 모래가 많은 포구였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주변이 휑하니 사막같이 느껴졌었다. 도로와 밭, 논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10여 년이 지나고 이번에 답사했을 때도 여전히 휑해 보였지만, 살포정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 사전 조사를 하고 답사해서인지 달리 보였다.
  현재 살포정이란 마을이 사라지고 없지만, 인터뷰 내용과 [지도 2]의 1915년에 생산된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지적도’를 보면 정읍군 우순면 우산리(牛山里) 144~151번지 등의 일대가 살포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밭을 포함하여 몇 가구의 집11이 있는 작은 규모의 마을이었던 것 같다. [지도 3]을 보면 ‘살포정의 주막터’가 있었던 곳은 정읍군 우순면 우산리 147번지이고 이 뒤로 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산을 넘어 정우면 장순리 송내마을로 가는 산길을 ‘살포정 고개’라고 하였다. 비록 마을은 사라졌지만 예부터 다니던 작은 길(小路)은 지금도 남아 있었다. 일행이 타고 간 차량이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이었다.


 [지도 2] 우산리 살포정 마을 추정지 (출처: 1915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지적도)


 

 [지도 3] 좌측: 1915년 지적도 확대, 우측: 현 우산리 147(살포정 주막터)번지 일대(출처: 네이버)


 
  지적도대로라면 살포정 고개의 입구에 ‘살포정 주막’이 있었던 것이다. 옛날에는 이와 같이 주로 마을이 시작되는 곳이나 산으로 오르기 전 또는 후의 지점에 주막이 있었다. 주막은 끼니를 때우거나 휴식처 또는 약속 장소로 널리 사용되었다. 상제님께서도 천지공사를 행하시며 다니실 때 여러 마을의 주막을 자주 들르셨다. ‘살포정 주막’에서는 1907년 가을에 상제님께서 신원일과 박공우 종도를 비롯한 몇 사람을 데리고 오셔서 쉬실 때 우레와 번개를 꾸짖으며 멈추게 하시는 천지조화의 권능을 보여 주기도 하셨다(교운 1장 25절).


[사진 1] 우산리 살포정 터 일대 현재 모습(2024년 9월 4일 촬영)



  살포정과 주막이 있었던 터 주변에는 우산교차로와 논과 밭뿐이었고 살포정 고개 쪽으로는 1호선 국도가 10m 정도 위쪽에 있었다. 살포정 고갯길을 넘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갯길을 중심으로 밭과 건물, 무덤 등이 있었는데 산의 형태가 분명치 않을 정도로 조금 낮게 느껴졌다. 좀 더 자세한 산의 형태를 추측하기 위해 1910년에 측도한 [지도 4] ‘조선총독부 정읍 지적도’를 확인해 보았다.  


[지도 4] 1910년에 측도한 조선총독부 정읍 지적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사진 2] 살포정과 살포정 주막터 뒷산 일대(우산리 덕재산 포함) (2024년 9월 4일 드론 촬영)


 
  [지도 4]에서 산의 경사를 알 수 있는 등고선을 보면 살포정 뒷산은 주변에 있는 덕재산처럼 높은 산이 아니라 완만하게 경사진 아주 낮은 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의 형태를 그릇에 비유하면 덕재산은 밥그릇, 살포정 뒷산은 작은 접시와도 같다. 살포정 주막터 좌측 주변은 침엽수림 지대로 소나무나 전나무가 있는 숲이었으며, 그 외 살포정 마을 터와 고갯길 주변은 주로 개간하지 않은 땅이었다. 고개 양쪽으로 넓고 낮은 지역은 대부분 논과 밭이었다.


 

 
  [지도 5]에서 1966년 정읍시청에서 제공하는 지도12를 보면 산 가운데가 하얗게 보이는데 이는 나무가 다 베어져 있는 모습이다. 2024년 지도에서는 이곳들이 개간되어 대부분 밭으로 경작되었다. 거기다 호남고속도로(1970년대, 1986년 확장 공사)와 태인과 정읍 간 국도 1호선(2007년)이 살포정 마을 터 뒤로 개통되면서 산의 모습이 [지도 5]처럼 조금씩 변하였다.
  살포정은 호승예불혈과도 관계가 있다. 공사 3장 20절에는 상제님께서 “태인 살포정 뒤에 호승예불을 써주리니…….”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이 내용은 두 가지 의미로 추측할 수 있다. 하나는 살포정 뒷산에 다른 명산의 호승예불혈 기운을 붙여 써주신다는 의미일 수 있고, 또 하나는 살포정 뒤에 호승예불혈이 있어 그 기운을 쓰신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호승예불혈을 확인하기 위해 상제님께서 말씀하셨던 전남 무안군 승달산의 호승예불혈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호승예불혈이 있는 명산은 많지만, 상제님께서는 『전경』에 전남 무안 승달산의 호승예불혈을 사명당(四明堂) 중 한 곳이라 지칭하시고 여러 번 언급하셨다13
  『전경』에서 상제님의 말씀과 관련된 전라남도 지역은 고흥, 칠산바다, 장성 손룡의 선녀직금혈, 나주, 무등산 등이 있다. 전남 무안 답사는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일행은 들뜬 마음으로 승달산 호승예불혈을 잘 볼 수 있는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에 도착했다.
  승달산(해발 332.5m)은 백두대간에서 서남부로 이어지는 마지막 지류의 산으로 남도의 바닷가에 위치한 호남 제1의 승지(勝地)이다. 승달산의 이름은 고려 인종(仁宗, 1109~1146) 때 승달산에서 수행한 원(元)나라 원명(圓明) 스님과 그의 제자 500여 명이 함께 깨달음을 얻었다는 데서 유래했다.14 승달산은 스님이 예불을 드리는 형상인 호승예불형(胡僧禮佛形)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승달산 아래 호승예불혈 처는 지금도 그 위치가 불분명하다.15 먼저 호승예불혈의 형태를 알기 위해 『명당도(明堂圖)』, 『도선국사 명당도』 등의 도서와 연구된 논문16을 찾아보고 답사하였다.
  동양 지리학에서는 산을 용(龍)으로 비유하여 ‘산맥’을 ‘용맥’이라 부른다. 혈(穴)에는 용이 몸을 서리고 머무르고 있는 듯이 ‘생기’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혈을 품고 있는 용맥의 형태는 동물의 형상을 가장 좋다고 하는데,17 완만하게 움푹 파인 이곳 호승예불혈을 『명당도』에서는 곰쓸개가 늘어진 듯(穴形懸膽)하다고 표현하였다.
  한국 최초의 풍수 시조이자 승려였던 도선(道詵, 827~898)은 무안 승달산 호승예불형을 여러 제자 가운데 늙은 스님이 스승(부처님)께 문안 인사(절) 드리는 형이라고 보았다. 승달산은 스승을 향해 팔을 뻗은 노승의 팔폭장삼을 중심으로 용맥이 좌우(좌청룡 우백호)로 뻗어나가는 형상이라고 한다. 폭이 넓은 팔폭장삼의 형태는 크고 작은 산들이 겹겹이 사이좋게 어우러져 마을과 월선 저수지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었다. 주산(主山)인 승달산 맞은 편에 있는 안산(案山)은 염주에서 떨어진 하나의 구슬에 속한다. 물론 풍수를 보는 이에 따라 안산을 목탁이라 보기도 한다. 혈 자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낮은 산이 동그란 형태로 단아하게 있어서 신비로웠다. 안산 바로 뒤에 있는 산들은 조산(朝山)으로 귀인을 의미한다. 살(殺)이나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조산은 부처 형상의 산으로 보기도 한다.18




  풍수에 대해 잘 모르지만, [사진 3]의 승달산 용맥 흐름 및 산도와 『도선국사 명당도』에 기록된 승달산의 호승예불혈 설명을 [사진 4]와 비교하며 현지에서 보니 정말 유사해 보였다. 더욱이나 편안함과 아늑함을 주어 길한 곳이라 여겨졌다. 이와 비교하면 살포정 일대에서는 이러한 호승예불혈의 형국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명확하진 않지만 『전경』의 “태인 살포정 뒤에 호승예불을 써주리니…….”라는 상제님의 말씀은 살포정 주변 어딘가에 호승예불혈의 지기를 붙이셨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사진 5] 월선리 저수지에서 바라본 승달산 전경



[사진 6] 월선리 저수지에서 바라본 안산(목탁 혹은 염주 한 알)과 조산(부처산)



  이번 답사를 통해 살포정이 정자가 아닌 마을 지명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살포정이 사라져서 아쉬웠지만, 살포정 주막터와 살포정 고개를 확인할 수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무안의 승달산 호승예불혈을 확인하기 위해 답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책으로만 보고 추정했던 곳인 호승예불혈을 직접 보니 명당도의 설명이 절로 떠올랐다. 상제님께서 이렇게 좋은 혈을 태인 살포정 뒤에 써준다고 하신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연구가 더 필요하겠지만, 스승께 문안 인사(절)를 드리는 의미가 담긴 호승예불혈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한가지 가능성은 무극도장과의 연관성이다. 살포정 주변은 태인 무극도장과 마주 보는 곳으로 도장에 모셔진 상제님을 향해 절을 드리기에 적당한 곳이다. 이런 점에서 무극도장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01 행록 4장 22절, 공사 3장 20절, 교운 1장 25절, 권지 2장 29절.
02 행록 5장 21절, 공사 3장 6절, 예시 67절.
03 행록 1장 27절. 현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하운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
04 행록 4장 22절. 현 정읍시 북면 복흥리 노송동.
05 교운 2장 20절. 현 경남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에 있는 정자.
06 교운 2장 30절. 현 경남 밀양시 상남면 남산리 369.
07 정(亭)은 오랜 세월 우리말 발음 습관에 의해 마을 또는 향촌을 뜻하는 고어(古語)인 ‘댕이[堂]’가 변해서 ‘쟁이[亭]’로 고착된 말이다. 마을에 ‘정자(亭子)’가 있어 붙여진 지명으로 해석하는 오류가 가끔 있다.
08 한글 학회, 『한국 지명 총람』 12 (서울: 한글 학회, 2003), p.445 참고.
09 상제님 재세 시 주소: 전북 고부군 장순면 사포리, 1914년 이후 주소: 전북 정읍군 우순면 우산리, 현재 주소: 전북 정읍시 정우면 우산리.
10 정읍시 장재동에 사는 주민 박OO 씨 인터뷰(2010. 7. 6, 정읍시 장재동).
11 우산리 146, 147, 149번지가 집터 대(垈)이다.
12 「우산리」, 정읍시청 홈페이지, https://webgis.jeongeup.go.kr/# (현 정우면 우산리 지역의 1966년 항공사진).
13 행록 5장 15절, 행록 5장 21절, 공사 3장 6절, 공사 3장 20절, 예시 67절.
14 「승달산」, 무안 관광 홈페이지, https://tour.muan.go.kr/tour/travel/seungdalsan 참고; 「승달산」, 『신증동국여지승람』 36권, https://db.itkc.or.kr/ 참고.
15 최창조, 『좋은 땅이란 어디를 말함인가』 (서울: 서해문집, 1990), p.349.
16 민병삼, 「증산의 풍수물형과 해원사상」, 『신종교연구』 33 (2015), pp.156-158; 신영대, 「전경에 기록된 사명당(四明堂)의 풍수 물형(物形) 연구」, 『대순사상논총』 41 (2022), pp.148-157.
17 와타나베 요시오, 『동아시아 풍수사상』, 이화 옮김 (서울: 이학사, 2010), pp.28-31 참고.
18 『도선국사 명당도』에 “사십사절(四十四節) 건해맥(乾亥脈)에 승달산(僧達山)에 특립(特立)하니, 금수병장(錦繡屛帳) 두른 곳에 우리 스승 계신다. … 저 노승(老僧)의 거동 보소. 백팔염주(百八念珠) 손에 쥐고 팔폭장삼(八幅長衫) 떨쳐 입고 모든 제자 강(講) 받을 때, 그중의 늙은 중이 스승께 문안(問安)할 제 염주(念珠) 하나 떨어져서 수구원봉(水口圓峰) 되었고 간태금성(艮兌金星)이 충천(沖天)하니 혈재방원(穴在方圓) 개정처(蓋粘處)이라….” 최명우, 『도선국사 명당도』 (고양: 신지평, 2005), pp.141-142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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