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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역사인물 : 소하
소하
 
 

연구원 김현진

 
“한 고조는 소하(蕭何)의 덕으로 천하를 얻었나니 너희들은 아무것도 베풀 것이 없는지라. 다만 언덕(言德)을 잘 가져 남에게 말을 선하게 하면 그가 잘 되고 그 여음이 밀려서 점점 큰 복이 되어 내 몸에 이르고 남의 말을 악하게 하면 그에게 해를 입히고 그 여음이 밀려와서 점점 큰 화가 되어 내 몸에 이르나니 삼가할지니라” 하셨도다. (교법 2장 50절)
 
  상제님께서는 한(漢) 고조 유방(劉邦, 기원전 246~기원전 195)의 천하 통일을 도운 소하(기원전 257~기원전 193)의 덕을 높이 평가하셨다. 소하는 한신(韓信, ?~기원전 196)·장량(張良, ?~기원전 187)과 더불어 한초삼걸(漢初三傑)로 불리며, 한나라를 세우는 데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는 비록 전쟁터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불패의 쾌거를 이룬 대장군 한신과 뛰어난 책략가 장량보다 더 큰 공로를 인정받아 일등공신이 되었다. 유방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주로 후방지원을 맡은 그가 어떻게 가장 큰 공을 인정받았는지 살펴보는 일은 위 구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에 관한 기록은 『사기(史記)』와 『자치통감(資治通鑑)』, 『한서(漢書)』에 기술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그가 초한(楚漢) 전쟁을 어떻게 지원하고 나라의 기반을 다졌는지 그의 생애와 업적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소하는 사수(泗水) 패현(沛縣) 풍읍(豐邑)사람이다. 가난한 집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2세에 관아의 종으로 들어가 17세에는 서적을 관리하는 말단 관직에 등용되었다. 그의 일은 매일 책을 꺼내 볕에 말리고 벌레가 파먹지 않도록 잡아내는 것이었다. 어느 날 들에 핀 국화에 벌레가 꾀지 않는 것을 보고 이를 응용해 서고(書庫)의 책벌레를 효과적으로 퇴치하여 사람들의 인망에 올랐다. 이때까지 글을 몰랐던 소하는 글을 배웠으며, 명석한 두뇌로 습득한 것을 단번에 외우고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는 부지런히 공부하여 1년도 되지 않아 서고에 있는 도서를 거의 다 읽을 수 있게 되었다.01 관아에서는 소하가 영민하고 성실하여 그만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소하가 26세가 되던 해, 진(秦)나라의 감군어사(監軍御史: 지방의 군무를 감찰하기 위해 파견하는 어사)가 파견되어 왔다. 소하는 탁월한 행정능력을 발휘하여 감군어사를 도왔다. 감군어사는 소하의 일 처리에 감탄하여 공무심사에서 그에게 최고점수를 주었다. 그리고 소하에게 진나라 도성인 함양(咸陽)으로 진출하라고 추천하였지만, 그는 진나라가 망해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하였다.02
 
 
유방과의 만남
  패현에 진나라 중앙에서 파견된 태수가 부임하였다. 그는 부랑자를 엄히 다스리라는 황제의 칙령을 받아 작은 마을에까지 부랑자소탕령을 내렸다. 하급관리까지 나선 소탕령에 소하의 형들이 붙잡히게 되었다. 소하는 패현의 현령(縣令)과 가깝게 지내던 터라 특별사면장을 받아 친형 5명과 유방과 번쾌03 등을 방면하였다. 소하는 방면한 사람들을 관아로 데려가 허드렛일을 맡겼다. 그렇게 소하는 유방과의 본격적인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04 소하는 유방이 관아의 잡다한 일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정장(亭長: 현 아래 행정단위인 정을 방어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유방은 정장이 된 후, 진시황의 전용도로를 만드는 토목공사에 배정되어 함양으로 부역을 가게 되었다. 떠나는 유방을 위해 주변 관리들이 여비로 300전씩 주었는데, 소하만 그에게 500전을 주어 유방이 고마워하였다.
  진시황 말기가 되면서 더 많은 장정이 군역이나 토목공사에 징발되었다. 부역이 너무 힘들어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이 늘면서 도망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진시황릉 묘역공사가 시작되면서 유방도 인부들을 인솔하여 다시 노역을 하러 가게 되었다. 가는 도중에 도망가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고, 유방도 그들을 억지로 끌고 가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하고서 자신도 도주하였다. 이후 유방은 사람들을 모아 패현 근처로 돌아와 소하와 뜻을 같이하였다. 소하는 자신을 죽이려던 패현의 현령을 피해 관아를 나온 후, 유방이 부로(父老: 마을의 어른)들을 설득하는 것을 돕고 패현을 정복하는 것에 동참하였다.05 점점 세력을 넓혀가는 유방을 따라다니며 본격적으로 그를 보좌하기 시작했다.
 
 
유방의 참모가 되어 전쟁을 지원하고 인재를 천거하다
  기원전 208년 말, 초(楚) 회왕은 유방과 항우(項羽, 기원전 232~기원전 202)에게 진에 대한 공격을 명하며 누구든지 함양에 먼저 진입하는 자를 관중의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였다. 유방이 먼저 진입하자, 항우는 40만 명의 대병을 이끌고 그를 치려 하였다. 이때 유방은 10만에 불과했으므로 유방은 얼른 사죄하는 뜻을 전했다.06 하지만, 항우는 그에게 오지인 파(巴)와 촉(蜀) 지역으로 갈 것을 요구하였다. 파와 촉은 험난한 잔도(棧道: 험한 벼랑 같은 곳에 선반을 매달아 만든 길)를 지나야만 갈 수 있는 곳으로 이는 유방이 관중(關中)07 으로 쉽게 나올 수 없도록 수를 쓴 것이었다. 이를 듣고 유방이 항우에게 반기를 들려하자 소하는 파촉 지역에 평야가 있어 군량미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고, 많은 장정(壯丁)이 살고 있어 군사를 모으기 좋다며 그를 말렸다.08그리고 잔도를 제외하고 관중으로 나올 수 있는 옛 도로가 있으므로 그것을 잘 보수하면 쉽게 군대를 이끌고 관중으로 나갈 수 있어 후일을 도모하기 쉽다고 간언하였다.
 
▲ 초패왕 항우의 19개 봉국 지도 (출처: 『사기본기2』, 알마출판사, p217. 책 지도 스캔)
 

  소하가 이렇게 유방에게 정보를 주며 후일을 기약할 수 있었던 것은 유방이 함양성을 점령하였을 때, 서책과 서류를 보관한 곳으로 가서 율령(律令)과 도서들을 챙겼기 때문에 가능하였다.09 서류에는 천하의 험준한 요새, 인구의 많고 적음, 물자가 많거나 적은 곳,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 등이 적혀 있었다. 이 자료는 이후 소하가 초한 전쟁을 뒷받침하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유방은 항우가 준 3만의 군사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파와 촉 지역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잔도가 너무 험난하여 휘하의 많은 장수가 도망을 갔으며 이때 한신도 같이 달아났다.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소하는 한신을 붙잡기 위해 유방에게 보고도 못 한 채 쫓아갔다. 소하는 한신을 설득하여 데려온 후 유방을 배알하여 그를 대장군으로 추천하였다. 유방에게 한중(漢中)의 왕으로만 머물 거면 몰라도 천하를 가지려면 꼭 한신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를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좋은 날을 가려 단장(丹粧: 옷차림을 곱게 꾸밈)을 베풀어 예식을 갖출 것을 청하였다.10 유방이 이를 수락하여 한신을 대장군으로 맞을 수 있었다. 소하는 정식 절차를 갖춤으로써 한신의 자존심을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한신이 갑자기 대장군이 되는 것에 대한 다른 장수들의 반감과 불만을 잠재웠다. 그리고 초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 한신을 추천하여 인재 천거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소하는 파촉에 도착하여 호구(戶口)를 관리하고 식량을 징수해 군량미를 확보하였다. 장정들을 징발하여 군사를 모아 유방이 다시 항우와 싸울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전쟁준비를 마친 유방은 항우의 팽성을 정복하였지만, 그의 반격으로 형양성으로 겨우 몸만 도망갔다. 소식을 들은 소하는 파촉 지역에서 거둔 식량을 수로와 육로를 통하여 형양성으로 운반하였다.11 소하는 유방이 5년간의 초한 전쟁 동안 항우에게 매번 패하여 쫓겨 다닐 때마다 식량과 군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한나라의 기반을 다지고 1등 공신이 되다
  소하는 유방이 전쟁할 수 있도록 군사와 물자를 준비하는 한편 그가 점령한 지역을 원활히 다스렸다. 관중 지역을 탈환한 후 소하는 진 제국 출신의 관리를 등용하여 지역의 민심을 얻었다. 부로들을 찾아가 사정을 듣고 분석하여 유방이 선정(善政)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초한 전쟁 동안 태자를 잘 보필하고 진나라 법을 보완하여 ‘구장률(九章律)’12 이라는 법을 만들었다.13 소하의 구장률은 후대에 나타나는 많은 법령의 모범이 되었으며, 백성들의 안정적인 삶에 도움을 주어 나라를 안정시키고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하였다.
  한 고조 4년 유방이 남아있던 반군세력을 정리하러 간 사이에 소하는 미앙궁(未央宮)을 비롯하여 동궐(東闕)·북궐(北闕)·무고(武庫)·큰 창고 등을 크게 지어 궁을 확장하였다.14 유방이 돌아와서 이를 보고 천하가 전란으로 고생한 지 몇 년이 되었는데 궁실을 과하게 지었다며 꾸짖었다. 이에 소하는 천하가 아직 통일되지 않고 어수선하기에 궁실을 지을 수 있었으며, 천자는 천하를 집으로 삼는 법이니 궁전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게 된다고 아뢰었다. 그리고 후세에 이보다 더 화려하게 짓지 못하게 하면 된다고 하자 유방이 기뻐하였다. 소하는 유방이 전장을 누비는 동안 나라의 제도를 확립하고 궁궐을 지어 물심양면으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고조 5년(기원전 202년)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마침내 천하 통일을 이루었다. 그 후 신하들의 업적을 따지는 논공행상이 열렸다. 그는 소하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여 1등 공신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전장을 누빈 무장들이 반발하였다. 자신들은 목숨 걸고 전장에 나가 싸웠지만 소하는 글과 붓을 잡고 의논만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유방은 사냥에서 들짐승과 토끼를 쫓는 것은 사냥개이지만 개의 줄을 풀어 짐승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것은 사냥꾼이라고 하였다. 장수를 사냥개에, 소하는 사냥꾼에 비유하여 그가 더 중요하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장수들은 혼자서 따르거나 두세 명이 따랐지만, 소하는 문중(門中)에서 수십 명의 사람이 유방을 따라 전쟁을 치렀으므로 그의 공이 더 크다고 하였다.15 이렇게 유방은 논란을 잠재운 후 소하를 1등 공신으로 삼고 제후로 봉하며 식읍(食邑)도 가장 많이 주었다. 제일 공신이 된 소하는 궁전에서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을 수 있게 되었고, 황제를 뵐 때도 작은 걸음으로 빨리 가지 않아도 되는 특혜를 누렸다. 그리고 유방은 소하가 일전에 그가 부역을 하러 갈 때 다른 사람보다 200전을 더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식읍 2,000호(戶)를 더 주었다.
 

소하의 처세
  소하는 평소 공손하였으며 자제하는 삶을 살아왔다. 집과 밭은 반드시 외딴곳에 마련하였고 집을 지을 때도 담장을 치지 않았다. 그는 후손들에게 후세에 자손이 현명하다면, 나의 검소함을 본받을 것이고 현명하지 못하더라도 권세 있는 사람에게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16 소하는 유방의 의심을 받았으나 주변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 위기를 슬기롭게 모면하였다.
  고조 3년 유방과 항우가 경현(京縣)과 색정(索亭)17 사이에서 대치 중일 때 유방은 소하에게 여러 번 사신을 보내 관중을 다스리고 군량미를 조달하느라 고생한다고 치하하였다. 소하는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포생(鮑生)이라는 자가 그에게 한왕(유방)이 고된 전쟁에서도 사신을 보내 위로하는 것은 당신을 의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자손들과 형제 중에서 싸울 수 있는 자를 뽑아서 한왕에게 보내는 것이 낫다고 권고하였다.18 소하는 이 말을 듣고서 자신의 식솔 중 싸움이 가능한 자를 추려 보내니 유방이 기뻐하였다.
  고조 12년 경포(黥布)의 반란이 일어나자 소하는 관중을 잘 다스리고 백성을 위로하며 자신의 재산을 털어 군대를 지원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소하를 칭송하였다. 유방은 관중으로 여러 사람을 보내 소하의 행적을 물어보았다. 그중 한 사람이 그에게 “당신은 백성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황상께서 당신이 관중을 동요시키지는 않는지 감시하기 위해 저를 보낸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전답(田畓)을 강제로 싸게 사서 스스로 명성을 더럽히는 것이 어떻겠소? 그리하면 황제께서 마음이 편안해질 것입니다”19라고 하였다. 소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20
  백성들은 소하가 집과 밭을 강제로 싸게 사들이자 분노하며 유방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유방은 소하에게 상소문을 주며 백성에게 사죄하라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소하는 백성을 위한다는 구실로 상림원(上林苑: 임금의 동산)의 공터를 백성들이 농사짓게 해달라고 하였다. 유방이 이에 크게 화를 내면서 소하를 가두어버렸다. 그러자 왕위위(王衛尉)가 백성들을 위해서 요청하는 것은 재상의 일인데 어찌 그를 가두었으며, 초나라와 5년간의 대치와 진희와 경포의 모반 때에도 관중을 지켰으므로 소하가 그럴 리 없다고 진언하였다. 진시황이 신하로부터 자신의 과실을 듣지 않아 천하를 잃었는데 소하의 조언은 듣지 않고 의심만 한다고 말하자 유방은 언짢아하면서 어쩔 수 없이 풀어주었다.21 이렇게 소하는 조언을 잘 받아들여 지혜롭게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소하는 한 혜제 2년(기원전 193년)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문종후(文終候)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것은 문서, 법도, 예의 조리(條理) 등을 지칭하는 문(文)의 궁극을 이루었다는 의미이다.22
  소하는 유방이 부랑자일 때부터 그를 돕기 시작하여 5년간의 초한 전쟁 동안 식량과 군사가 떨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지원하였다. 그리고 법과 제도를 만들어 나라의 기반을 확립하였으며, 전장에서 불패의 쾌거를 이룬 한신을 추천하여 인재 천거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소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자신의 것을 내세우지 않고, 심지어 유방이 끊임없이 의심하고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음에도 꾸준히 그를 보필한 것을 보면 그가 탁월한 참모임을 알 수 있다. 상제님께서도 소하의 이런 공적을 보시고 그의 덕으로 유방이 천하를 얻었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전경』
반고, 『한서』, 김하나 옮김, 경기: 팩컴북스, 2008.
사마광, 『자치통감2』, 권중달 옮김, 서울: 삼화, 2002.
사마천, 『사기 본기2』, 김영수 옮김, 서울: 알마, 2012
_____, 『사기 세가』, 김원중 옮김, 서울: 민음사, 2010.
_____, 『사기 세가(하)』, 정범진 옮김, 서울: 까치, 1994.
렁청진, 『제왕과 책사』, 박광희 옮김, 경기: 다산북스, 2015.
신동준, 『사람은 어떻게 처신하는가』, 경기: 역사의 아침, 2016.
오치규, 『유방의 참모들』, 경기: 위즈덤하우스, 2015.
이시야마 다카시, 『유방의 참모학』, 이강희 옮김, 경기: 사과나무, 2006.
이세동, 「협서율(挾書律) 폐지에 대한 회의」, 『중국어문학』 60집, 2012.
 
 
 

01 이시야마 다카시, 『유방의 참모학』, 이강희 옮김 (경기: 사과나무, 2006), pp.20~22 참조.
02 반고, 『한서』, 김하나 옮김 (경기: 팩컴북스, 2008), pp.227~228.
03 소하, 유방과 같은 고향사람이며 유방과 함께 전장을 누비는 장수이다. 사마광, 『자치통감 2』 (서울: 삼화 2002), p.212.
04 이시야마 다카시, 앞의 책, pp.23~26 참조.
05 사마천, 『사기 세가』, 김원중 옮김 (서울: 민음사, 2010), p.797.
06 사마천, 『사기 본기2』, 김영수 옮김 (서울: 알마, 2012), pp.312~313.
07 함곡관(函谷關) 서쪽, 산관(散關) 동쪽, 무관(武關) 북쪽, 소관(蕭關) 남쪽에 위치하여 네 관문의 중앙에 있었기 때문에 ‘관중(關中)’이라고 하였다. 대체로 지금의 섬서성(挾西省) 관중 평원 일대를 가리킨다. 사마천, 『사기 세가(하)』, 정범진 옮김, (서울: 까치, 1994), p.562.
08 오치규, 『유방의 참모들』 (경기: 위즈덤하우스, 2015), p.80.
09 사마천, 『사기 세가』, pp.797~798.
10 신동준, 『사람은 어떻게 처신하는가』 (경기: 역사의 아침, 2016), pp.114~115.
11  사마천, 『사기 본기2』, p.223, p.329 참조.
12  구장률의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진서(晉書)』 「형법지(刑法志)」에 따르면 소하는 도율(盜律), 적률(賊律), 수율(囚律), 포율(捕律), 잡률(雜律), 구율(具律), 흥률(興律), 구율(廐律), 호율(戶律)의 9편을 제정하였다. 도율과 적률은 절도ㆍ상해ㆍ살인과 관련한 내용이고, 수율과 포율은 구금과 체포에 관한 것이며, 잡률은 경교(輕狡), 월성(越城), 박희(博戱), 가차(假借), 불렴(不廉), 음치(淫侈), 유제(逾制) 등을 다스리기 위한 법률이고, 구율(具律)은 형벌의 가감을 명시한 것이며, 흥률은 요역(徭役: 부역)과 관련한 법률이고, 구율(廐律)은 마필의 관리를 위한 것이며, 호율은 호구의 관리를 위한 법률이라고 한다.[이세동, 「협서율(挾書律) 폐지에 대한 회의」, 『중국어문학』 60집 (2012), pp.10-11.]
13  오치규, 앞의 책, p.83 참조.
14 사마천, 『사기 본기2』, pp.331~333.
15 사마천, 『사기 세가』, pp.799~802.
16 오치규, 앞의 책, p.86.
17 경현과 색정은 모두 지금의 하남성 형양 경내에 위치하는 지역이다. 반고, 앞의 책, p.231.
18 사마천, 『사기 세가』, pp.798~799.
19 같은 책,  pp.803~806.
20 렁청진, 『제왕과 책사』, 박광희 옮김 (경기: 다산북스, 2015), pp.638~639 참조.
21 사마천, 『사기 세가』, 김원중 옮김 (서울: 민음사, 2010), pp.802~806.
22 오치규, 앞의 책,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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