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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역사인물 : 전국시대 사군자(四君子): 맹상군(孟嘗君)

전국시대 사군자(四君子):

맹상군(孟嘗君)



연구위원 신상미



  이 글에서는 『전경』 예시 59절 손병희의 만사(輓詞)01에서 손병희의 명성과 비교된 전국사군자(戰國四君子)02 중에서 첫 번째로 꼽히는 맹상군(孟嘗君, ?~기원전 279)이란 인물에 대해 『사기(史記)』 「열전(列傳)」과 『전국책(戰國策)』,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맹상군은 제나라 위왕(威王, ?~기원전 320)의 막내아들인 전영(田嬰, ?~?)의 서자로 이름은 문(文)이다. 맹상군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5월 5일 단오절에 태어난 아이의 키가 문설주03의 높이만큼 자라면 반드시 집안에 우환이 생기게 된다는 그 지역의 전설04 때문에 맹상군은 장성할 때까지 부친 몰래 모친에 의해 키워졌다. 처음 부친을 대면했을 때 맹상군은 사람의 운명은 문설주가 아닌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라고 하면서 계속 문설주를 높이면 집안에 우환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부친을 설득하였다.05
  그리고 얼마 후 그는 부친에게 나라의 경제가 힘든데 부친의 재산이 더 축적되고 있는 까닭을 물으며 걱정하였다. 40여 명이 넘는 아들 중에 맹상군만큼 현명한 자가 없다고 생각한 부친은 정식으로 그를 아들로 받아들인 후 집안일을 돌보게 하고 식객들을 대접하게 했다. 그 후 식객들에 의해 제후들에게 알려진 맹상군은 부친이 사망한 후 기원전 321년에 부친의 후계자가 되어 설(薛)06의 영주가 되었다. 그래서 맹상군을 설공(薛公)이라고도 하였다.07
  맹상군은 자신의 재산으로 봉읍지인 설 땅에서 식객들을 후하게 대접하였기에 수천 명의 식객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그의 식객은 신분이 낮으나 지식이 있는 사람과 죄를 짓고 도망쳐온 자 등 다양하였다. 맹상군은 그들을 차별하지 않고 자신과 같은 반찬의 상을 차려 함께 식사할 정도로 식객을 아끼고 잘 대접하였다. 식객과 이야기할 때는 병풍 뒤에 서기를 두고 대화를 기록하게 하였고 그 이야기 중에 나온 친척에게까지 선물을 보냈다. 그래서 식객 대부분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정성을 다하는 맹상군을 서로 친한 사이라 여겼다.
  맹상군이 어질다는 소문을 들은 진 소왕(秦昭王, 기원전 324~251)은 그를 만나고 싶어 했다. 기원전 300년에 소왕이 처음 만남을 청했을 때 진나라는 호랑이 입과 같은 나라이므로 절대 가면 안 된다는 식객 소대(蘇代)08의 충언을 듣고 가지 않았으나, 기원전 298년 무렵 맹상군은 제나라의 외교사절로 진나라에 가게 되었다. 진 소왕은 그를 재상으로 삼으려고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러나 진나라 신하의 반대로 소왕의 생각이 바뀌어 맹상군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를 눈치챈 맹상군은 소왕의 애첩에게 그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소왕을 설득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애첩은 소왕이 갖고 있던 흰 여우 가죽옷을 자신에게 주면 도와준다고 하였다. 맹상군은 개처럼 몰래 궁중 창고의 개구멍으로 들어간 식객의 도움으로 가죽옷을 훔쳐 애첩에게 갖다 줄 수 있었다. 애첩의 설득 덕분에 풀려난 맹상군 일행은 급히 성을 떠나 함곡관(函谷關)이란 관문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은 새벽을 알리는 닭이 울어야 문이 열리는데, 닭울음을 흉내 내는 식객의 도움으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계명구도(鷄鳴狗盜)’라는 고사는 이 내용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식객들은 ‘닭의 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과 개의 흉내를 잘 내는 좀도둑’을 무시했지만, 맹상군은 이런 식객을 인정했기에 무사히 진나라 궁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09




  제 민왕(齊湣王, ?~기원전 284)은 자신의 명으로 맹상군이 진나라로 갔다가 목숨을 잃을뻔했기 때문에 이에 보답하기 위해 맹상군이 제나라에 도착하자 바로 재상으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그 후 진나라에 대한 원한을 갚고자 맹상군은 한나라·위나라·제나라가 연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게 되었을 때, 초나라를 공격한 후 진나라도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식객 소대는 서주(西周)와 진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전쟁 없이 모든 나라가 친선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며 그를 설득하였다. 맹상군의 선택으로 한나라와 위나라·제나라·초나라·진나라는 큰 피해를 보지 않고 친선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네 나라가 제나라를 은인의 나라로 여기게 되었다. 이후에 맹상군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10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식객이 더 많아지자 봉토에서 거둔 세금만으로는 식객들을 모두 먹여 살리기 힘들었다. 그래서 설 땅의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이자로 부족한 돈을 충당하려 하였다. 그러나 받을 채권이 밀려있는데도 수금을 하지 못하자 식객 풍환11을 보내 받아오게 하였다. 풍환은 이자 10만 전을 거두었으나 그 돈으로 설 땅의 사람들과 잔치를 벌여 다 써버리고, 이자를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기한을 정해주고, 가난하여 갚기 힘든 사람들의 채권 증서를 불태워버렸다.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난 맹상군에게 풍환은 맹상군의 집에 필요한 것이 ‘의(義)’이므로 의를 위해 그리하였다고 말하였다.12
  그로부터 1년 후 맹상군은 모함으로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진나라와 초(楚)나라의 비방에 현혹된 제 민왕이 맹상군을 쫓아낸 것이었다. 이에 맹상군은 설 땅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미처 다다르지 않았는데도 설 땅의 사람들이 맹상군을 영접하기 위해 길을 메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왕의 의심을 사서 재상에서 파면당하자 많은 식객이 그를 떠나 씁쓸하였는데, 그를 마중 나온 설 땅의 사람들을 보고 위안이 되었다. 이 일로 맹상군은 더욱 풍환을 신뢰하게 되었다. 풍환 또한 맹상군의 신의에 보답하기 위해 진나라 왕에게 유세(遊說)하여 그가 다시 제나라의 재상이 되게 하려는 지략을 세웠다. 제나라 왕은 진나라가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맹상군이 진나라의 재상이 되는 것을 막고 그에게 옛 봉읍지는 물론 천 호의 영지를 더 주었다.13 
  맹상군이 다시 제나라로 복귀하고 풍환이 식객을 맞이했을 때 맹상군은 여전히 자신을 떠났던 식객들을 원망하고 있었다. 풍환은 그러한 그를 타이르고자 시장을 비유하여 설득하였다. 아침에 열리는 시장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이유는 아침 시장을 사랑해서가 아니며, 저녁에 열리는 시장에 사람이 없는 이유는 사람들이 저녁 시장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은 다만 구하는 것이 있으면 가고, 없으면 떠나는 것이라 하였다. 맹상군은 그의 말을 듣고 떠났던 식객들을 원망하지 않고 다시 예전처럼 대우하였다.
  제 민왕은 송(宋)나라를 멸망시킨 후 더욱 교만해져 또 맹상군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에 식객들을 데리고 위나라로 간 맹상군은 위 소왕(魏昭王, ?~기원전 277)에 의해 위나라 재상이 된 후 진나라, 조나라, 연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제 민왕은 달아나 거(莒)14에 있다가 기원전 284년에 죽었다. 그 뒤를 이은 제 민왕의 아들 제 양왕(齊襄王, ?~기원전 265)은 맹상군을 두려워하여 그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맹상군은 제후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나라를 세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맹상군은 제 민왕이 죽고 6년 후 기원전 278년에 삶을 마감하였다.15
  맹상군이 어릴 적에 겪었던 서러움 때문이었을까? 그는 전국사군자 중에서 유독 신분의 차별 없이 인재를 우대하고 선비들을 공경하였다. 특히, 맹상군은 주변에서 보잘것없는 인물이라 하여도 그 인물의 능력을 파악하는 안목을 지녔으며 자신에게 무례하게 하여도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여 이해하고 믿고자 하였다. 결국, 신분과 상관없이 인재를 공경하는 그의 노력과 그에게 은혜를 갚고자 한 식객들로 인해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할 수 있을 것이다.






01 만사는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로 만장(輓章)이라고도 한다.
“…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말씀하시고 그의 만사를 다음과 같이 지어서 불사르셨도다.
 知忠知義君事君 一魔無藏四海民 孟平春信倍名聲 先生大羽振一新”
 (지충지의군사군 일마무장사해민 맹평춘신배명성 선생대우진일신)
 ‘맹평춘신배명성(平春信倍名聲)’은 ‘손병희의 명성이 맹평춘신의 명성보다 배로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02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 ?~기원전 278),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기원전 251), 초(楚)나라의 춘신군,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기원전 243)을 말하며,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라고도 한다. 이들은 전국시대 말기에 널리 인재를 우대하고 선비들을 공경하여 명성을 떨친 인물들이다.
03 문짝을 끼워 달기 위하여 문의 양쪽에 세운 기둥.
04 중국 민간에 ‘흉함의 5월’이라는 말이 있다. 5월의 중요한 절기인 하지는 음양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절기로, 양기가 위로 음기가 아래로 내려가 뱀과 곤충이 나타나고, 여름의 독기가 퍼지게 되어 사람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존의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금기 사항이 많다. 특히 5월 5일은 제일 흉한 날로 ’불길한 날‘이라 불렀다. 샤오팡, 『중국인의 전통생활풍습』, 김지연 외 2명 옮김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2008), pp.252-267 참고.
05 사마천, 『사기열전(史記列傳) 上』, 정범진 외 옮김 (서울: 까치, 2003), pp.213-215 참고.
06 지금의 산동성 등현(滕縣) 남쪽에 있는 읍 이름.
07 사마광, 『자치통감 1』, 권중달 옮김 (서울: 삼화, 2007), p.142 참고.
08 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외교가인 소진(蘇秦)의 동생.
09 『사기』에는 299년이라고 되어 있고, 『자치통감』에는 기원전 298년에 맹상군이 진나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시기별로 정리된 『자치통감』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사마광, 『자치통감 1』, 권중달 옮김 (서울: 삼화, 2007), p.191 참고.
10 사마천, 『사기열전(史記列傳) 上』, 정범진 외 옮김 (서울: 까치, 2003), pp.218-219 참고; 미야기카니 마시미츠, 『맹상군과 전국시대』, 한병옥 옮김 (서울: 기파랑, 2010), pp.87-90 참고.
11 『전국책』에서는 풍훤(馮諼)으로 기록되어 있다.
12 유향, 『전국책(戰國策) 2/4』 , 임동석 옮김 (서울: 동서문화사, 2009), pp.532-535 참고.
13 『전국책』에서는 맹상군이 수레 50승과 금 5백 근을 주어 진나라가 아닌 양(梁)나라로 유세하러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14 지금의 산동성 거현.
15 사마천, 『사기열전(史記列傳) 上』, 정범진 외 옮김 (서울: 까치, 2003), pp.221-222 참고; 유향, 『전국책(戰國策) 2/4』 , 임동석 옮김 (서울: 동서문화사, 2009), pp.616-618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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