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산야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내 생애 처음으로 동남아시아 여행에 나섰다. 20여 명의 일행과 함께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을 둘러본 이번 여행은, 국제 심포지엄과 보육원 방문 등 의미 있는 일정이 곁들여져 여행의 참뜻을 더욱 깊게 했다.
이번에 참가한 국제 심포지엄은, 요즘 아시아 각국에서 크게 일고 있는 ‘한류’ 열풍의 바람직한 착근 방법에 대해 모색하는 매우 의미 있는 자리였다. 베트남의 보육원 방문 역시 과거 전쟁의 아픈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이 나라에 조그마한 정성이라도 보탤 수 있었다는 점에서 뜻깊은 행사였다고 할 수 있다.
종단 대순진리회는 음양합덕과 해원상생 사상을 바탕으로 인류의 화합과 평화의 증진을 위해 노력하며, 신인조화의 구원사상을 펼치고 있다. 이번 동남아시아 방문에서처럼,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자리에 적극 참여하고 사회에 대한 봉사를 확대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은 가보았지만 이번 여행국들은 모두 초행이어서 개인적인 감회도 더욱 컸다. 병술년 2월 26일(음력), 양력으로는 3월 25일 오후 5시에 탑승하여 30여 분만에 이륙한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지상의 풍경이 그러한 느낌을 더하게 했다. 검푸른 바다와 혼미한 창공만 보일 뿐이지만 미지의 땅을 밟는다는 기대와 흥분은 어느 여행보다 더했다.
기내의 비행정보 도면을 보니 항로는 인천에서 수원, 목포, 제주도를 거쳐 대만으로 잡혀 있었다. 기내식으로 나온 비빔밥을 맛있게 먹은 뒤, 차를 마시고 나니 어느새 대만 상공에 도착했고, 이어 필리핀해협과 베트남을 거쳤다. 밤 10시에 기장의 안내방송이 단잠을 깨웠다. 칠흑같은 어둠뿐이던 창밖은 방콕 돈무앙 국제공항에 가까워지면서 점차 밝아졌다. 태국의 수도답게 전등불이 빛나는 방콕은 도시계획이 아주 잘 되어 있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10시 40분에 공항에 내린 우리 일행은 한국 외교관의 안내를 받아 시내 호텔에서 무사히 첫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끝낸 우리는 고도 아유타야로 향했다. 아유타야는 1991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이다. 1767년 버마(미얀마)에 의해 침공받기 전까지 417년간 태국(당시에는 시암왕국)의 수도였던 이곳은 태국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한 후 우통왕에 의해 1350년 세워진 도시이다.
33대에 걸친 왕들이 기거했던 아유타야는 국제 무역항이었다. 중국과 일본인들에게 비단, 차, 도자기를,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에게는 후추, 향료, 향나무를, 시암인들에게는 양철, 쌀, 장뇌, 빈랑나무 열매를, 특히 인도의 왕과 귀족을 위해 코끼리를 팔았다. 아유타야의 전성기에는 영국 해적, 캄보디아 왕족들, 프랑스 사제들, 페르시아의 상인들, 세계 방방곡곡에서 찾아온 탐험가들과 상인들로 붐비는 곳이었다고 한다.
국제 무역교류가 활발하여 아시아에서 사원과 궁전이 가득한 가장 번창한 도시 중 하나로 알려졌던 이곳에는 지금도 관광객이 넘쳐나고 있다. 가는 길에 보니 자연호수가 많고, 갈대숲이 우거졌으며 넓은 논에는 소가 노닐고 있었다. 황색, 백색, 흑색의 소들은 1천여 마리는 되어 보일 정도로 많았다. 아유타야 고도에는 미얀마에 의해 파손된 불교 사원이 있었는데 여러 불상 중에서도 정적에 잠긴 와불(臥佛)이 인상적이었다.
역사와 전통이 숨쉬는 아유타야에서는 태국 고대 왕국과 수백 년 동안 잘 보존된 유적지들을 둘러 볼 수 있다. 수목이 우거진 길을 버스로 달려 다시 시내로 나왔다. 왕궁과 분리된 사원에는 원형의 탑원이 남아 있었다. 곳곳에 부처상이 있어 가히 불국의 천지라 칭하여도 손색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이동하면서 보니 사방이 지평선이고 산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특이했다. 쌀농사를 주로 짓는 나라인데 정말 크고 넓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주는 동방의 큰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가정이나 공장, 관공서 등 빈 땅에는 1800여 종의 수종이 자라고 있다 하니 공기의 정화도 잘 될 듯하였다. 다만 수도 방콕에는 지반이 약한 탓인지 고층 건물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호텔에서 정장으로 갈아입고 행사장으로 가니 국회의원 김재홍 의원이 먼저 나와 있어 함께 행사장에 입장했다. 행사장에는 대사관 직원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김재홍 의원의 주제발표가 있은 후 필자는 종단 대순진리회 중앙종의회 의장으로서 축사를 하였다.
축사에서는 먼저 대한민국 국회 정치커뮤니케이션연구회와 연예기획사인 지엠엠 인터내셔널(GMM International), 그리고 언론사 네이션(Nation)지 간에 ‘아시아 문화교류 활성화 방안’ 모색을 위한 자리로 태국 방콕에서 국제 심포지엄이 열린 것을 축하했다. 그리고 심포지엄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과 노력을 해준 아시아문화산업교류재단과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과 참석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 국제 심포지엄은 문화교류에 있어서 아시아적 가치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분명히 정립하고, 아시아의 지역적 연대성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개최되었으며, 일방적인 ‘한류’ 접근이 아닌 상호 호혜적인 문화교류의 장을 모색하고자 준비되었다.
이 국제 심포지엄을 주최한 국회 정치커뮤니케이션연구회는 2004년 7월 여야 국회의원 60명으로 구성된 정치커뮤니케이션 관련 전문연구단체다. 한국사회의 공공의제 해결을 원활히 수행해 나가기 위한 법적·제도적 대책을 수립하고, 국가의 장기 비전을 수립하기 위한 국내외 커뮤니케이션 활동과 장기적으로는 아시아 평화번영에 기여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심포지엄 장소로 태국을 선택한 것은 최근 이 나라에서 한국의 ‘대장금’이라는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등 ‘한류문화’의 확산과 관련이 있다. 한류열풍으로 우리 한국에 대해 많은 태국 국민들이 관심과 기대치가 높다. 이를 통해 양국관계가 문화교류를 바탕으로 정치, 경제 등 전반에 걸쳐 긴밀한 우방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축사에서는 이러한 점을 밝히고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문화교류를 넘어서 문화동반자로, 더 나아가서는 아시아연대를 구축하는 토대가 되는 자리가 되기를 기원했다.
세계는 과거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및 다원주의 체제로서 적과 우방이 명확하였지만, 이제는 서로의 이익과 안녕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형태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글로벌한 세계정책 속에서는 국가 간 또는 집단 간, 그리고 개인 간에 상생의 이념이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상대방을 잘 되도록 도와줄 때 결국 내 자신과 내가 소속한 조직이나 국가가 번영한다. 이러한 문화가 정착될 때 온 천하가 한 집안이 되어 조화와 평화가 무르익을 것이다. 축사에서 이런 취지의 말을 한 뒤, 이러한 상생문화가 한국과 태국 양국 간에도 긴밀하게 정착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그 축사를 통해 이번 심포지엄에 참석한 사람들의 가슴속에 상생의 씨가 뿌려지고 나중에 커다란 나무로 자라 훌륭한 열매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튿날인 3월 27일에는 에메랄드 사원으로 가서 황금사리탑을 보았다. 거대한 대웅전과 황금 칠을 하고 에메랄드 보석장식을 한 탑, 천불도 더 되는 불전 등을 볼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큰 건물이 있는데 안내원이 2층은 연회장이고, 3층은 왕족의 유골보관소라고 알려줬다. 그 옆의 큰 건물은 장례식장이라고 했다.
태국에서 제일 큰 강 차오프라야강으로 이동하였다. 차오프라야란 말은 장군 또는 왕이라는 뜻이다. 강의 길이는 365km라고 했다. 배를 타고 가며 보니 수상가옥이 끝도 없이 진열되어 있다. 안내원은 수상 마을이라고 했다. 식빵을 사라는 상인의 말을 듣고 몇 봉지 사서 물에 빵조각을 던지니 큰 고기들이 물고 가는데,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고기가 많았다.
캄보디아로 가기 위해 태국공항을 떠날 때는 한국 대사관 직원들이 나와 환송했다. 오후 6시경 캄보디아 씨엠립공항에 내려 호텔에 투숙한 뒤 이튿날 아침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앙코르와트로 갔다.
앙코르와트는 사방에 해자가 있는데 폭이 200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긴 다리를 건너는 도중에 해태상과 코브라뱀같은 조각이 있고 목이 없는 불상도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고대의 석물은 훼손되고 성벽은 와해된 채로 산재하여 있었다. 내부로 들어가니 남북이 1300미터이고, 동서가 1500미터라고 했다.
캄보디아 시엠립시 북쪽 6.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이 사원은 1860년 프랑스의 곤충학자 앙리 무오가 곤충채집하러 정글에 들어갔다가 이곳을 발견한 이래 아직까지도 그 비밀이 다 밝혀지지 않은 엄청난 캄보디아 왕국의 유적지라고 한다.
폭이 10여 미터가 되는 도로로 1킬로미터 이상 가는데 석문 중간에 종횡으로 나열된 불상을 많이 모셔두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들어가서 상층까지 돌계단을 오르는데 발판의 넓이는 10센티미터 또는 5센티미터 정도였다. 계단은 약 100개 정도였는데 긴장이 되어 정신을 한껏 가다듬고 정상에 올라가니 가운데는 비어 있고 사방은 불상을 모시고 있었다. 정상에서 밑으로 내려올 때는 철근으로 된 손잡이가 있어 이것을 잡고 내려왔다.
내려오니 또 다시 사방 대청마루와 내부가 크나큰 방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었다. 이 엄청난 석재를 어디서 운반하고 왔는지, 어느 솜씨 좋은 석공이기에 이렇게 섬세하고도 우아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정경을 만들어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섬세하고 우아한 조각의 그림은 사방의 내부와 외부의 벽면 정상에까지 돌에다가 수를 놓았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지붕에도 돌을 조각하였는데 역시 섬세한 수를 놓으면서 지붕을 장식하였다. 너무도 거대하고 웅장하고 높고 넓기에 말로써는 어떻게 표현하여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직도 울창한 산림으로 덮여 있는 숲을 지나 따푸롬 사원을 찾아갔다. 담장의 길이가 8킬로미터라고 하는 사원이었다. 사원에 들어서니 엄청난 석물조각들이 모두 산산히 무너져 있었다. 여기는 왜 정부에서 관리를 하지 않고 이렇게 무참히 돌보지 않느냐고 물었다. 안내양은 어떻게 하면 고도(古都)와 사원이 훼손되는 것인지, 자연에 의하여 훼손되는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이대로 방치하고 있다고 한다. 무슨 나무인지 몰라도 자기 몸보다 큰 뿌리가 석물을 파고들어 훼손하고 석물을 안고 있는 것이 한두 곳이 아닌 수십 곳이 있었다.
사원을 나와 호텔에 와서 일식 우동 한 그릇을 먹고 씨엠립 공항으로 가서 하노이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월남전 때 말로만 듣던 월맹이 정권을 잡은 베트남을 직접 가보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감회가 깊다. 밤 11시20분에 하노이공항에 도착하여 하롱베이에서 잠자리에 들 때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넘었다.
하롱베이에서 맞은 아침, 무의식중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기묘묘한 바위섬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동편의 창을 보니 하롱베이에서 건너편 섬으로 길고도 높은 육교가 놓여 있었다. 이 나라도 건설을 통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도 많은 섬이 보여 하롱베이의 섬이 몇 개나 되는지 물으니 약 3000개쯤 된다고 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확히 2998개라고 하는데, 이 많은 섬들과 연결하기 위한 교통수단으로 교량이 많이 가설될 것 같았다.
베트남의 본토는 길고 길지만 도서와 더불어 면적을 확장시킨다면 큰 대국의 면모를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낮 11시가 되어 배를 타고 관광에 나섰는데, 뱃놀이 도중에 보잘 것 없는 동혈에 들어가 보니 석순은 모두 잘라 팔아버린 상태이고 동굴 자체의 모든 기능은 중지된 상태로 있다. 동굴 안은 습기도 없고 물이 없는 죽은 동굴이 되어 있었다.
다시 배를 타고 수많은 섬들을 구경하다가 오후 2시에 식사를 했다. 호텔에 와서 짐을 챙겨 하노이로 향했다. 밝은 낮에 선상에서 하롱베이를 보니 파도가 없는 바다에 해초가 없어 고기도 없고 갈매기도 없는 3무형상의 항구라고 할 수 있다. 선상에서는 한국의 제주도에나 있는 다금바리 회를 식초를 곁들여 맛있게 잘 먹었다.
하노이에서는 한국 대사관옆 건물에 있는 ‘베트남 띠엔커우희망고아원’과 ‘럽탁희망보육원’을 방문해 1500달러씩 합계 3000달러를 전달했다. 전달식에서는 뜻깊은 자리를 마련해준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에 감사를 표한 뒤, 비록 작은 정성이나마 한국이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한 심심한 사과가 되길 바라는 마음과 양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작은 힘이 되었으면 한다는 바램을 전달했다. 또한 이번 자선 행사가 ‘베트남 띠엔커우 희망고아원’과 ‘럽탁희망보육원’에 빛과 소금이 되길 바라며, 앞으로 자라나는 세대에는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계가 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밤 12시에 하노이 비행장으로 가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밤새 날아 인천 공항에 내리니 아침 6시가 되어 있었다. 더운 나라를 돌고 온 탓인지 한국의 새벽은 추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몸은 고단해도 의미있는 행사를 잘 마무리하고 돌아왔다는 생각에 마음만은 뿌듯했다. 처음인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방문을 통해 세계를 향한 시야를 넓힌 것도 큰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2006.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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