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님께서 탄강하신 함안 조씨 문중(門中)의 계보(系譜) 탐구 下
함안 조씨 12대 손 조려 선생은 생육신 중 한 분
조열의 손자는 생육신 중 한 분으로 널리 알려진 조려(趙旅: 1420~1489, 함안 조씨 12대 손, 호 어계(漁溪)) 선생이다.
조선 초기 세종의 아들 문종이 병약하여 재위 2년 만에 죽자, 그 아들 단종(조선 제6대왕, 1441~1457)은 12세라는 어린 나이로 즉위(1452)하게 된다. 1455년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이 왕위를 찬탈하자, 진사에 합격한 뒤 태학(太學: 성균관)에 있던 조려 선생은 낙향하여 낙동강 가 백이산(伯夷山: 훗날 숙종이 조려 선생의 충절을 기려 이름지어준 산)에 은거해 버렸다.
한편 1456년 6월에 집현전 학사 출신들인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들이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실패하여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자, 다음 해 6월에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당하였다.
『영월읍지(寧越邑誌)』에 실린 ‘호배도강전설(虎背渡江傳說)’에 따르면 그때 조려 선생은 함안에 살면서도 오백 여 리나 되는 영월 땅을 매월 세 번씩 찾아가서 단종께 문안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순흥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금성대군이 또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탄로나자, 세조는 1457년 10월 21일 금성대군과 단종의 장인 송현수(宋玹壽)를 죽이고 10월 24일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로써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치게 되었다.1) 함안에 있던 조려 선생은 이 이야기를 듣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 밤에 영월 청령포에 당도하였으나 물은 크게 불어 있었고 건너갈 배가 없었다.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고는 의관을 등에 지고 물을 건너려 할 때, 문득 누가 뒤에서 옷을 당기기에 돌아보니 큰 호랑이가 한 마리 있었다. 선생이 놀라지 않고 “임금의 상(喪)을 당하여 먼 길을 달려왔는데 이 강을 건널 수 없구나. 내가 무사히 이 강을 건너 임금의 시신을 염습하면 다행이지만, 만약 건너지 못하면 푸른 물에 귀신이 될 것인데, 너는 어찌 나를 잡아당기는고!” 하였더니, 문득 호랑이가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는 것이었다. 선생이 그 뜻을 짐작하고 호랑이 등에 업혔더니 과연 호랑이가 나루를 건네다 주었다. 드디어 단종의 시신이 버려진 곳에 도착해서 통곡·사배한 후 옥체를 수렴하고 문을 나오니 호랑이가 다시 강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사(正史)에 따르면 단종은 유배지 청령포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월 시내의 동헌 객사인 관풍헌에서 죽었고, 단종 시신을 거두어 묻은 사람도 당시 영월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嚴興道)라고 한다. 그럼에도 정사와는 내용이 다른 조려 선생의 전설이 따로 영월에 전하고 있는데, 아마 이것은 영월에 살았던 사람들이 선생의 단종을 향한 극진한 마음에 감명 받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구전(口傳)으로 전해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1703년에는 유생 신만원(辛萬元) 등의 건의에 따라 조려 선생은 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등 다른 생육신과 더불어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2)
정조 때는 선생에게 이조판서를 증직(贈職)하고 정절공(貞節公)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함안 조씨 문중에서는 1986년 영월읍에서 청령포로 가는 흰재 정상 우측에 선생의 사적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조연(趙淵)은 내헌공파(耐軒公派)의 파시조(派始祖)
조려 선생의 손자는 참의공(參議公) 조연(趙淵, 1489~1564, 함안 조씨 14대 손)으로서 함안 조씨 21원파3) 중 내헌공파(耐軒公派)의 파시조(派始祖)이다. 조연은 중종 시절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 벼슬을 하고 있었으나 당시 김안로(金安老, 1481~1537)가 국정을 크게 어지럽히자4) 이에 실망하여 낙향한 분이다.
조연(趙淵)의 손자 조방은 곽재우와 함께 의병장으로 활약함
조연의 손자 두암공(斗巖公) 조방(趙垹: 1557~1638)은 함안 조씨 16대 손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 젊은이 100여 명과 함께 곽재우(郭再祐)를 따라 창의(倡義)5)하여 적을 물리친 분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방은 다시 곽재우와 함께 창녕 화왕산성을 지키고 적을 무찔렀다. 전쟁이 끝난 후 조방은 나라에 그 공을 알리지 않고 낙동강 우포의 말바위[두암(斗巖)]에 반구정(伴鷗亭)6)을 지어 은거하고, 마주 바라보이는 곽재우의 창암정(滄巖亭)을 수시로 왕래하면서 여러 벗들과 더불어 교우하였다. 돌아가신 후 조정에서는 가선대부 호조참판을 추증하였으며, 조방은 함안 조씨 75지파 중 두암공파의 파시조(派始祖)가 되었다. 그런데 두암공파는 조방의 아들 조위도(趙衛道, 1579~1656)를 파시조로 하여 우제공파(愚齊公派)라고 불리기도 한다.
조위도의 10대 손은 홍문관 정자(正字) 겸 춘추관 기사관(記事官), 승정원 주서(主書) 등을 지내신 주서공(注書公) 조영규(趙瑩奎, 1861~1905, 함안 조씨 27대 손)이다. 도주님의 조부가 되시는 이분은 나라의 위태함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낙향하셨다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분개하여 토혈(吐血) 서거하시었다.
도주님께서는 함안 조씨 29대 손의 인신(人身)으로 탄강
도주님께서는 이런 계보(系譜)를 가진 문중(門中)에서 함안 조씨 29대 손(내헌공파 16대 손, 우제공파 13대 손)의 인신(人身)으로 탄강하시었다. 존휘는 철제(哲濟), 자함은 정보(定普), 존호는 정산(鼎山)이셨으며 때는 을미(乙未)년 12월 4일로서 양력으로는 서기 1896년 1월 18일의 일이었다.
<교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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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종은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6살 때는 할머니를, 10살 때는 할아버지(세종)를, 12살 때는 아버지(문종)을 잃었으며, 12살에 왕이 되었으나 15살 때 폐위 당하고 17살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왕이었다.
2) 그간 서산서원에서는 조려 선생의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매년 생육신들에 대한 제를 올려 왔으며, 최근에는 김시습 등 다른 생육신들의 후손들도 여기에 참여한다고 한다.
3) 함안 조씨 21원파 함안 조씨는 크게 21원파로 나뉘고 다시 그 속에 75지파로 나뉜다.
4) 원래 김안로는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할 만큼 학식이 뛰어났으며 조광조와 함께 나라를 개혁시키려고 노력한 유능한 인재였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이 중종의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駙馬)가 되자, 허항(許沆)·채무택(菜無擇)·황사우(黃士佑) 등과 실권을 장악하여 정적이나 뜻이 맞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제거해버리는 간악한 인물로 변해버렸다. 그는 1537년에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5) 국난을 당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킴.
6) 원래의 반구정은 도주님의 13대 조(祖) 두암공께서 낙동강 우포 말바위 위에 처음 세웠으나 수해를 자주 입자 1858년 현재의 위치인 경남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용화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1924년 여름에 도주님께서는 밀양 종남산 영성정(靈聖亭)에서 폐백도수(幣帛度數)를 다섯 달 동안 보시다가 이곳 반구정으로 옮겨 마치셨다.(교운 2장 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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