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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국제학술답사를 다녀와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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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국제학술답사를 다녀와서(2)

 

 

  1) 유교 - 국자감(國子監)

  불교 사원인 옹화궁에서 10분 정도 걷다보면 ‘성현가(成賢街)’, ‘국자감가(國子監街)’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국자감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린 곳으로 원조(元朝) 10년(1306)에 건설되어 원ㆍ명ㆍ청 3대에 걸친 7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교육분야의 최고행정기관과 최고학부였던 이곳은 집현문(集賢門), 태학문(太學門), 벽옹(    雍), 이륜당(彛倫堂), 경일정(敬一亭) 등이 중국 전통적인 대칭형식의 공간배치로 구성되어 있다.

국자감의 입구에 해당하는 집현문(集賢門)에는 『논어(論語)』「위정(爲政)」편에 있는 짧은 글귀가 찾는 이의 마음을 끌게 했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두워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공자는 아무리 지식이 많은 전문가라 하더라도 현실에 맞게 응용할 수 있는 사고력이 없다면 그 사람을 ‘어둡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선현들이 오랜 시기에 걸쳐 찾은 방법들에 대해 소홀히 하면 ‘위태롭다’라고 말한 것이다. 마음에 경종을 울리는 글이다.

  현판에 새겨진 글을 다시 생각하며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조용히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내부에는 왼쪽에 종정(鐘亭)이, 오른쪽에 고정(鼓亭)이 있어 은은한 종소리와 힘찬 북소리가 귓가에 스쳐지나가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외심과 경건함도 주위에서 산발적으로 터지는 공사현장 소음에 싹 가시고 말았다. 현재 국자감은 2008년 북경올림픽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보수공사가 진행 중인데 건물들은 공사 준비로 포장이 되어 있고 내부에 들어가도 휑하니 텅 비어 있다. 앞에 서 있는 공자상만 묵묵히 웃으며 우리들을 반길 뿐이다. 중국 대륙을 주유(周遊)하며 끊임없이 ‘인(仁)’사상을 펼쳤던 성인! 만약 공자가 지금의 중국에 다시 오면 어떤 심정일까? 그 웃음 뒤에 허탈감이 느껴진다.


  2) 도교 - 백운관(白雲觀)

  북경 서편밖에 자리하고 있는 백운관은 중국 도교협회 소재지로서 현재 중국 도교의 총본산이다. 중국에서 불교와 유교가 한때 왕권강화 차원에서 국가 정책으로 시행되었던 종교라면 도교는 백성들 마음속에서 자리 잡고 있었던 민간신앙에 가깝다. 그래서 어쩌면 13억 인구를 가지고 있는 중국을 좀 더 자세하게 보여주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백운관은 당(唐)대 739년에 건조되었고 본명은 천장관으로서 노자를 모시는 곳이었다. 금(金)대 태화 3년(1203)에 태극궁으로 바뀌었고 원(元)대 태조 19년(1224)에는 장춘(長春) 구처기(丘處機, 1148~1227)가 한때 이곳에 거주했다고 해서 장춘궁이라 개칭되었다. 현재의 이름인 백운관은 명(明)대 홍무 27년(1394)부터 사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운관은 면적이 1만여㎡, 북경 현존 최대 규모의 도관(道觀)으로 건물이 웅장하고 기세가 비범하며 중ㆍ동ㆍ서 3로(路)와 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에는 영관전(靈官殿), 옥황전(玉皇殿), 삼청각(三淸閣), 사어전(四御殿), 재신전(財神殿)이 분포되어 다양한 신들이 모셔져 있다. 영관전에는 도교의 호법신 영관상이 모셔져 있고 동서 양쪽 벽에는 마승, 조공명, 온경, 악비 4대 원수가 마치 살아있듯이 그려져 있다. 무덤덤한 표정에 매서운 눈이 향을 올리는 방문객들의 마음을 내려다 보고 있는 듯하다. 내심 약간 놀란 마음에 얼른 발걸음을 떼어 다음 건물로 향하면 호천옥황대제상이 모셔져 있는 옥황전이 나온다. 백운관 맨 끝에는 2층 누각이 있는데, 위층에는 도교의 최고 존신 3분이 모셔져 있는 삼청각이, 아래층에는 천상계의 네 대제가 모셔져 있는 사어전이 있다.

백운관 내 여러 건물 중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모여 향 연기도 건물 전체 자욱하게 퍼져있는 곳이 있다. 어딘가 살펴봤더니 재물을 기원하는 재신전! 재복(財福)을 기원하는 참례자의 표정에 묻어나는 진지함이 더욱 돋보여 묘한 감정이 일어났다. 백운관에는 그밖에도 민간 전설에 나오는 여러 신선들을 비롯해 많은 신들을 볼 수 있어 신과 사람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단지 화려하고 강렬한 색상이 과장스러울 만큼 나타나 보는 이가 주눅이 들 정도라 한발 물러서게 만드는 것이 아쉬움이라면 나만의 생각일까?


  3) 천주교 - 남당(南堂)

  다음으로 찾은 곳은 마테오리치(利瑪竇; 1552~1610)가 세운 천주교 성당인 남당. 상제님께서 서도(西道)의 종장으로 세운 마테오리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지상천국의 뜻을 품고 온 파란 눈의 선교사, 마테오리치의 역사가 남아 있는 이곳을 둘러보는 것은 또 다른 감흥에 젖게 해주었다.

 북경 선무문(宣武門) 내 북순성(北順城)에 있는 이곳은 1601년 마테오리치가 선교를 위해  북경에 세운 4개의 성당 중 가장 먼저 건립한 것이다. 그는 신종에게 선무문 안의 땅을 하사받아 동당, 서당, 남당, 북당을 건립했고 1644년 아담 샬이 개축했다고 한다. 성당을 들어서면 화려하지는 않으나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풍긴다. 내부공간은 장방형의 십자가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양쪽 벽에는 예수의 고행을 기록한 벽화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정작 마테오리치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유적은 건물 외에 따로 없었으니 그가 과거 이곳에서 활동했던 모습을 회상하면서 감흥에 젖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1582년에 중국에 온 이후 중국문화의 이해와 선교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심지어 중국인의 성당 방문을 쉽게 하기 위하여 성당을 사찰로 칭하기도 하였으며 교칙마저 중국실정에 맞게 변통했다고 한다. 마테오리치가 1610년 5월 11일 북경에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던 이곳 남당에는 그의 뜻을 기려 천주에게 기도하는 신자들의 발길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믿었던 종교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던 마테오리치! 혹시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을 정말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번 행사를 통해 어깨 너머로 막연하게 들었던 중국이라는 대륙을 좀 더 실감나게 느꼈다. 넓은 영토와 장구한 역사로 빚어진 다양한 문화가 행사기간 동안 우리들을 압도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마음 한 곳에서는 대륙 한 구석에 위치한 한반도가 그나마 중국에 귀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영역을 지켜왔다는 자부심이 버티고 있었다. 그런 자부심은 사명감으로 이내 바뀌어  나타났다. ‘어떻게 하면 이 곳에 상제님의 도가 전해져 나갈 수 있을까?’ 이번 행사를 통해 이런 고민과 그에 대한 각오가 선 것이 보람이라면 보람이었다. 세계포덕을 위해 우리 자신이 무엇을 갖추어야 할지 생각하며 한국으로 돌아왔다.                                     

 <교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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