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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역사코너 : 대한제국 시기 ‘채권’과 ‘채무’에 대한 책임

대한제국 시기
‘채권’과 ‘채무’에 대한 책임



연구원 김현진




  『전경』에 보면 채권과 관련된 구절이 몇 군데 있다. 채권을 불살랐다는 내용과 채권자의 고발로 순검에게 끌려가는 부분 등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빚을 갚지 않아 채권-채무 문제가 발생했을 때 집행된 이런 조치는 현재와 사뭇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전경』에 나오는 시기의 채권 개념과 채무 불이행에 대한 연대 책임 범위, 그에 따른 제재를 고찰하여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채권은 한자에 따라 2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 돈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이며 이때는 ‘채권(債權)’이라는 한자를 사용한다. 『전경』에서는 행록 1장 17절, 행록 3장 23절, 제생 18절에서 ‘빚을 받을 권리’라는 뜻으로 쓰였다. 둘째는 ①남에게 빌린 돈의 금액을 적어놓은 장부 또는 ②국가, 지방 자치 단체, 은행, 회사가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발행하는 증권이라는 뜻으로 쓰이며 이때는‘ 채권(債券)’이라 쓴다.01 이 중 예시 34절이 ①의 뜻으로 쓰였다. 관련 구절을 보면, 상제님께서 하루는 자신이 알고 계시는 문자로서도 능히 사물을 기록하리라 말씀하시고 옥편, 천수경·사요(史要)·대학 등과 형렬의 ‘채권 문서’를 불사르셨다는 공사 내용에서 ‘채권 문서’는 돈의 금액을 적어놓은 장부의 뜻으로 보인다. ②의 뜻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생겨난 채권 개념으로서 1910년에 ‘국고 채권’에 대한 조례를 반포(조선왕조실록)02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국가에서 자금 조달을 위한 목적으로 채권을 발행하는 개념은 1910년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는 유교의 영향으로 대부(貸付: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음) 활동을 천하게 여겼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상업이 발달하고 상품-화폐경제가 뿌리를 내리면서 아주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18세기 이후 모내기법(이앙법)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였고 전국 2,000여 곳에 장시(시장)가 형성되면서 많은 사상(국가에 신고하지 않고 상업 활동을 벌인 상인)이 등장하였다. 이에 따라 상품과 화폐가 활발히 유통되면서 대부 활동도 함께 발달하였다. 대부 활동은 재산을 증식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에 상인들뿐만 아니라 돈 있는 양반이나 왕족들, 사대부 여성들도 재산 축적을 위해 많이 참여하였다.03 특히 대부 활동을 천하게 여겼던 당시 사회 분위기를 의식하여 양반들은 노비나 상인 등의 명의로 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돈은 보통 차용증을 쓰고 빌려주었지만 돈을 제때 상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법적인 송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채무 불이행의 연대 책임 범위
  채무(빚을 갚아야 하는 의무)에는 공채와 사채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공채는 국가의 여러 가지 세금을 체납하거나 환곡(還穀: 흉년이나 춘궁기에 곡식을 빈민에게 빌려주고 추수기에 다시 거둬들이던 제도)으로 곡식을 빌리고 갚지 못해서 생기는 채무라고 할 수 있다. 사채는 개인 간의 금전거래에서 발생한 빚에 대한 의무이다. 빚은 당사자가 갚아야 하는 것이었지만, 특히 조선 시대에는 국가의 세금이 개인에게 부과되기도 하지만 가구(戶)에 부과되는 일도 있어서 채무의 대상자가 개인으로만 한정되지는 않았다.
  채무와 관련된 법전을 보면, 1786년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 「호전(戶典)」 징채조(徵債條)에는 일반 양인들이 공채와 사채를 불문하고 채무자 및 친부자(親父子)만 채무 징수가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다.04 「호전」 징채조는 국가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규정을 말한다. 또한, 1785년에 편찬되어 1786년에 시행된 『대전통편(大典通編)』 「호전」 징채조에는 오래 묵은 빚은 처나 자식에게 재산이 있으면 징수할 수 있다고 규정해 놓았다.05 “이러한 조항들은 개인이 진 빚을 그 일가족에게 채무를 이행토록 범위를 확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마지막 법전으로 1865년에 만들어진 『대전회통(大典會通)』 「호전」 징채조에는 이전의 법전보다 채무 이행의 범위가 더 넓어졌다. 채무자가 사망 및 기타 이유로 부재한 경우 채권자는 친부자는 물론 형제, 친족, 일시적으로 같이 거주한 사람에게도 채무의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고 명시하였다.06 채무 당사자가 빚을 갚지 않았을 경우 그 채무를 부인이나 자손은 물론 친척과 동거인이 갚아야 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대전통편』의 규정보다 채무 이행의 범위가 친척과 동거인으로까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전회통』 이후 구한말까지 채무 이행의 범위를 새롭게 규정한 법은 제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대전회통』의 채무 관련 조항은 상제님 재세 시에도 관행에 따라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6년에 제정된 「형률명례(刑律名例)」07 는 형벌과 관련된 내용만으로 조항이 구성되어 있어서 다른 법률사항에 관한 규정은 없었다. 상제님께서 유년 시절에 부친께서 갚으셔야 했던 수백 냥의 빚을 재기(才器)로 탕감받으셨던 일화는 이러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있었던 일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채무 불이행에 대한 법적 제재
  채무 당사자가 채무를 갚을 수 없을 때는 친인척과 처자식이 갚아야 했는데 처자식이 능력이 안 될 때는 관아에 끌려가 처벌을 받거나 노비로 팔려 가기도 했다. 빚을 갚지 않아서 치러야 했던 처벌은 국가에 진 빚인 공채냐 아니면 개인 간의 거래인 사채냐에 따라서 제재가 달랐었다.
  공채인 경우 『수교집록(受敎輯錄)』08 (1698) 「호전」 징채조에 보면 600냥 이상의 빚을 기일 안에 변제하지 못하면 양인, 공·사 노비, 평민을 가리지 않고 당사자는 정배(定配: 죄인을 지방이나 섬으로 보내 정해진 기간 그 지역 내에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게 하던 일)하고 처자는 몰수하여 대출해준 관청의 노비로 삼았다. 400냥 이상을 갚지 못한 자는 전가정배(全家定配: 모든 가족이 정해진 기간 지역 내에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게 하는 것)하되 채무 징수의 편의를 위해 서울에 있던 관아의 채무이면 경기 일원에 정배하였다. 100냥 이상을 상환하지 않으면 당사자는 대출해 준 관아 근처에 기간을 정하지 않고서 정배하고 그 처자는 몰수하여 관노비로 삼았다.09 그러나 채무자나 그 자손 중에서 채무를 다 갚으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주었다.10  
  개인 간의 금전거래인 사채를 제때 갚지 못하였을 때는 공채와 달리 빚을 갚지 못하였다고 채권자가 강제로 노비로 끌고 가지는 못하였다.11 대신 조선 시대 기본 형법으로 작용하였던 『대명률(大明律)』을 따랐다. 첫째로, 5관(貫: 500냥) 이상의 금액을 3개월이 지나도록 갚지 않으면 태형(笞刑: 작은 회초리로 볼기를 치는 형벌) 10대에 처하였고 1개월마다 한 대씩 추가하되 태형 40대를 초과하지는 못한다고 되어있다. 둘째로, 50관(5,000냥) 이상의 금액을 갚기로 한 날짜로부터 3개월이 지나도록 갚지 않으면 태형 20대에 처하고 1개월마다 한 대씩 추가하되 태형 50대를 초과하지 못한다고 명시되어있다. 셋째로는 250관(25,000냥)을 3개월 동안 이행하지 않으면 태형 30대에 처하고 1개월마다 한 대씩 추가하되 장형(杖刑: 곤장으로 볼기 윗부분을 치는 형벌) 60대를 초과할 수 없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원금과 이자를 모두 강제 집행하여 채권자에게 반환하도록 정하고 있다.12
  이러한 공채와 사채의 두 가지 제재 중에서 『전경』에 나오는 내용은 사채와 관련된 것이다. 제생 18절에는 상제님께서 권능으로 신원일의 부친이 진 빚을 탕감하시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빚 독촉에 시달리는 원일의 부친을 측은히 여기셔서 채권자에게 “우리 두 사람이 오늘 일기를 알아맞추어 탕감의 내기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하셨다. 내기에 응한 그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라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자 상제님께서는 “반드시 비가 오리라”고 하시니 조금 뒤 비가 내려 빚을 탕감하였다는 내용이다.
  『전경』 행록 3장 23절에는 황참봉의 아들이 황참봉의 친우인 황숙경이 돈을 갚지 못하자 그를 경무청에 고발하여 ‘옥에서 신세를 썩게 하리라’고 위협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연말이 되어서 순검에게 끌려가게 된 것을 본 황참봉의 부인이 “저 어른은 너의 부친의 친구인데 어떻게 금수와 같은 행위를 하느냐”라고 아들을 책망하며 채권 증서를 빼앗아 불사른다. 이 일화에서 ‘옥에서 신세를 썩게 하리라’는 내용으로 보아 고발에 따라 옥고를 치렀다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이 상황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법률로는 『대명률』과 「형률명례(刑律名例)」 그리고 『형법대전(刑法大全)』이다. 『대명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형벌은 사형·유형·도형·장형·태형13인데 이 중에서 도형(徒刑)은 중대한 범죄자에게 괴롭고 힘든 일을 시키는 형벌이다. 「형률명례」는 갑오개혁기에 형벌 개혁의 일환으로 1896년에 반포된 것이다. 제5조를 보면, 형벌을 사형·유형·역형·태형으로 나누어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역형은 감옥에 죄인을 가두어 놓고 노역을 시키는 ‘징역형’을 말한다. 또 1905년에 『대명률』과 『대전회통』을 반영하여 제정된 형법서인 『형법대전』14에서는 형벌을 사형·유형·역형·금옥형·태형으로 나누었다. 징역형을 역형(役刑)과 금옥형(禁獄刑)으로 나누어서 노역을 시키는 것을 옥형, 가벼운 죄로 노역하지 않고 옥에 가두어 놓는 것을 금옥형으로 구분하였다. 황숙경의 일화에서 말하는 ‘옥살이’의 근거법령은 『형법대전』이 제정되기 1년 전인 1904년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적용되는 법률은 「형률명례」이다. 「형률명례」는 법무대신 서광범이 태형, 장형, 유배형, 도형을 부분적이나마 징역으로 대체하자는 의견이 반영되어 제정된 법률이다.15 그래서 황참봉의 아들이 말한 옥살이는 징역형인 ‘역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화 속에는 채무의 액수가 나와 있지 않아 형량의 경중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다만 황참봉의 아들이 ‘옥에서 신세를 썩게 하리라’고 말한 점으로 보아 갚아야 할 금액이 작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렇듯 『전경』에 쓰인 채권은 채무를 청구할 수 있는 권한과 빚을 기록한 문서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부모의 채무를 승계하는 것이 선택이지만 상제님 재세 시에는 처자식과 주변 친인척까지 갚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지금은 채무를 갚지 못하면 사기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이상 형사적으로 처벌을 할 수 없지만, 재세 시에는 채무의 금액에 따라 관의 처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01 『표준국어대사전』
02 『순조실록』 3년 5월 14일, 양력 1번째 기사 “1910년 대한 융희(隆熙) 4년 국고 채권 조례를 비준하다. 법률 제5호 국고채권조례(國庫債券條例)를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03 이영호, 『한국근대지세제도와 농민운동』, (서울: 서울대 출판부, 2001), pp.120-130 참조.
04 “公私負債子 親父子外 兄弟及一族止接人  一切勿侵”[이재목, 「조선왕조의 채권법 제도에 관한 연구, 법사학 연구』 28, (2003), 재인용].
05 負公私宿債子 雖身死 有妻子財産者許徵”[이재목, 「조선왕조의 채권법 제도에 관한 연구」, 『법사학 연구』 28, (2003), 재인용].
06 “公私債子 親父子外 兄弟及一族止接人  一切勿侵”[이재목, 「조선왕조의 채권법 제도에 관한 연구」, 『법사학 연구』 28, (2003), 재인용].
07 「형률명례」는 1896년 4월에 반포된 법령이며 조선시대 형법의 기본인 『대명률』이 시대적 한계를 드러내자 상황에 맞게 내용을 변경하여 만든 형벌총칙이다.
08 1698년(숙종 24)에 왕명으로 이익(李翊), 윤지완(尹趾完), 등이 편찬한 총 6권 2책의 법전.
09 이재목, 「조선왕조의 채권법 제도에 관한 연구」, 『법사학 연구』 28, (2003), pp.172-173 참조.
10 『추관지(秋官志)』, 「考律部」, “公債徵捧事目”
11 이재목, 앞의 글, p.174 참조.
12 『대명률(大明律)』, 「戶律」, 違禁取利條: “其負欠私債, 違約不還者 五貫以上 違三月笞一十, 每一月加等, 罪止笞四十, 五十貫以上 違三月笞二十, 每一月加等, 罪止笞五十, 二百五十貫以上 違三月笞三十, 每一月加等, 罪止杖六十, 並追本利給主.”
13 사형(死刑)은 목숨을 끊는 형벌, 유형(流刑)은 먼 섬이나 벽지로 귀양 보내는 형벌, 도형(徒刑)은 염전이나 철광산에서 강제노역을 시키는 형벌, 장형(杖刑)은 볼기 위쪽을 곤장으로 치는 형벌, 태형(笞刑)은 가는 매로 볼기를 치는 형벌.
14 『형법대전』은 1905년에 『대명률』과 『대전회통』 그리고 갑오개혁기의 법령을 종합하여 제정되었다. 『대명률』과 크게 달라진 점은 많지 않았는데, 변경된 내용으로는 갑오개혁기에 수정(태형과 장형의 통합)된 형벌의 종류(사형ㆍ유형ㆍ역형ㆍ금옥형ㆍ태형)와 신분제 철폐를 적용한 형률의 변경 그리고 외국인의 출입국과 관련된 형률의 변경 등이었다.
15 김헌주, 「갑오개혁 이후 ‘특별형법’의 제정과 역할(1895~1905)」, (고려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9),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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