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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2년(2022)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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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이야기 : 만인 함열(萬人咸悅)

만인 함열(萬人咸悅)



교무부 이은희



<그림1> 상제님께서는 1897년 금구군 내주동(현재 전북 김제시 봉남면 내광리 내주마을)에서 팔도 주유를 시작하셨다. 위쪽으로 익산군 이리(현재 전북 익산시의 중심 시가지 지역)를 거쳐 향적산(香積山: 현재 충남 계룡시의 산)에 있던 후천 정역을 밝힌 인물인 김일부를 만나셨다. 다시 계속하여 팔도를 두루 유력하시다가 주유의 마지막 길을 함열(현재 전북 익산시의 일부 지역)에서 마치시고, 고향인 고부군 객망리(현재 전북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로 돌아오셨다.
( Google Earth 지도 위에 행적지 표시 )



  천하 창생이 진멸할 지경에 빠지자, 원시의 모든 신성ㆍ불ㆍ보살의 하소연으로 상제님께서는 천하를 대순하시다가 세계 창생을 건지려고 인간의 몸으로 강세하셨다. 상제님께서는 상생(相生)의 후천 선경(後天仙境)을 열기 위해, 9년간의 천지공사를 위한 준비 단계로 1897(정유)년부터 인심과 속정을 살피고자 주유의 길을 떠나셨다. 글방을 하시던 금구군 내주동을 떠나 익산군 이리를 거쳐, 향적산(香積山)에 있던 후천 정역(正易)을 밝힌 인물인 김일부(金一夫, 1826~1898)를 만나셨다. 계속하여 경기ㆍ황해ㆍ평안ㆍ함경ㆍ경상도 등 전국 곳곳을 두루 유력하시다가 함열에 이르셨다. 이러한 3년 주유의 마지막 행로에 관해 행록 2장 4절에서는 “주유하시다가 상제께서 함열(咸悅)에 이르셔서 ‘만인 함열(萬人咸悅)’이라 기뻐하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제님께서는 이렇게 함열에서 주유를 끝맺으신 다음에야 고향인 객망리로 돌아오셨다.
  그런데 상제님께서 주유하시다가 함열까지 가셔서 “만인 함열”을 말씀하시며 주유를 마치신 데에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법 2장 41절에서 어떤 사람이 “증산께서 하는 일은 참으로 폭 잡을 수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상제님의 말씀이나 행보에 대해 우리 범인으로서는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함열이란 지명의 의미가 어떠한 것인지 다각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상제님께서 만인 함열이라 기뻐하신 뜻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지리(地理)로 본 함열
  상제님 당시 함열군은 전라북도의 북서부에 자리하여 금강(錦江)을 사이에 두고 충청남도와 마주하고, 현재 익산시의 함열읍과 성당, 웅포, 함라, 황등면에 걸쳐 있는 지역이었다. 함열군은 금강 덕분에 수로 교통이 편리해서 신석기 시대 이래 농경문화가 번창했으며 삼한 시대부터 인근 지역의 정치ㆍ문화의 중심지가 되어왔다.01 또 고려와 조선에서는 함열 연안의 조창(漕倉: 성당창)에 국가 세미(稅米)를 보관하는 역할 이외에도 상품 유통을 위한 상업적인 수운 수로의 역할도 하였다.02 이렇게 함열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중요한 거점으로 해상로를 통한 경제 중심지였다.


<그림2> 해동지도 함열현도(1872년)
함열현을 감싸고 흐르는 큰 강줄기인 백마강(白馬江)이 금강이다.(백마강은 금강의 하류 구간을 일컫는 이름),
[지도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뿐 아니라 함열은 농사에 좋은 토질도 갖고 있었다. 함열의 위쪽을 흐르는 금강은 다른 하천에 비해 발원지의 고도가 높지 않으나 유로가 길어 우리나라 하천 중 경사가 가장 완만하고 연중 유량 차이가 작아 홍수 피해가 적어서 주변에 규모가 큰 평야들을 이루었다.03 더군다나 금강의 큰 강줄기는 함열 지역을 포근히 감싸 안으면서 남서 방향으로 천천히 흐르는데, 여기에 지역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함열천이 산북천(山北川)과 합류하여 북쪽으로 흘러 금강에 들어가므로, 주변에는 넓은 충적(沖積) 평야가 형성되었다. 덕분에 그 땅은 비옥하고 농경지가 광활하게 펼쳐지게 되었고, 벼농사가 활발하여 유역인들의 좋은 삶의 터전이 되었다.04 



<그림3> 대동여지도(1861년)
금강 아래의 오른쪽 네모난 구역에 있는 함열 영역이 상제님 당시의 함열군이다. 함열의 상단에 있는 ‘조운(漕運, 우측 상단 황색 동그라미) 성당창’은 17세기에 설치된 것으로 전라도 함열을 포함한 인근 8읍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관장했는데, 현재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에 있다. (김승대, 「1872년 ‘함열현지도’를 통해 본 역사 읽기」, 《전북문화살롱》 35호, 2021. 11.)



<그림4> 물길이 비단결 같다는 뜻의 금강(錦江)
전북 장수 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류와 만나며 북쪽으로 흐른다. 다시 남서 방향으로 돌아 백제의 심장부였던 공주와 부여, 익산 등을 지나며 충남과 전북의 경계를 이루면서 군산을 통해 황해로 흘러나간다.


  함열의 또 다른 별칭은 ‘함라(咸羅)’인데, 함열의 서쪽에 있는 함라산(咸羅山, 240.5m)은 풍수적으로 함열 지역을 보호하는 주산(主山)이다. 함라산 중턱에는 약 500m에 걸쳐 일렬로 서 있는 바위가 있고 가운데 염주바위가 있는 나산괘염(羅山掛念)이 있어서, 이로 인해 함라산은 마치 승복을 입은 승려가 염주를 가지고 함열 땅 쪽을 향해 팔을 벌리고 안으려는 것처럼 보인다.05 특히 함라산 아래의 함라마을은 풍수에서 전형적인 부자 터로 함라산을 등지고 뿌리인 미륵산을 바라보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을 이루고 있으며, 하천들도 함열 일대를 감싸 안듯이 돌아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 덕분인지 이곳은 가뭄과 홍수의 피해가 다른 곳보다 현저히 적다고 한다.06 게다가 상제님 당시의 함열은 육모폭포와 청류정, 나산괘염 등 함라팔경으로 산수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림5> 현 익산시의 함열
함열읍과 성당, 웅포, 함라, 황등면 일대가 상제님 당시의 함열군에 해당한다. 함열 일대의 지형을 보면, 왼쪽의 함열 땅의 주산인 함라산과 오른쪽 하단의 미륵산이 마주 보고 있고, 경사가 완만하고 연중 유량 차이가 작아 잘 범람하지 않는 금강이 함열 일대를 감싸 안고 천천히 흐른다. 여기에 지역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함열천이 산북천과 합류하여 금강으로 흘러 들어가서 함열 일대는 가뭄과 홍수의 피해가 적고 흙이 쌓이는 위치로 지리적으로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다. / 네이버 지형지도



인물(人物)로 본 함열
  함열은 좋은 지리적 여건과 함께 인정이 흐르는 곳이기도 했다. 19세기에 처음 수록된 판소리 단가(短歌) 호남가(湖南歌) 가사에는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이라고 전한다.07 함열이 이렇게 인심 좋은 곳으로 소문난 것을 알려 주는 신문 기사도 있었다. 1932년 6월 24일 자 《동아일보》는 「2개월간 130여 명에게 배식한 함열 3부자」라는 제목의 미담을 보도했다. 이들은 딱한 형편으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덕을 베풀어 사람들은 일제의 가혹한 한반도 수탈 시기에도 숟가락 하나만 들고 있으면 배고픔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08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인문 지리서인 『택리지』에서 ‘살기 좋은 곳’으로 네 가지 조건, 즉 풍수학적 지리(地理), 기름진 땅과 물자 교류[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를 언급했는데,09 상제님 당시의 함열은 이를 모두 구비한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제님 당시에 살았던 함열 출신 인물에는 조선 24대 헌종(憲宗)의 계비(繼妃)인 효정왕후(孝定王后, 1831~1904)가 있다. 효정왕후는 조부가 함열현감으로 재직할 때 관사(館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함열현은 성지(聖地)로 인식되었다고 한다.10 또 특기할 만한 인물에는 남궁두(南宮斗, 1526~?)가 있다. 그도 함열 출신으로 본관이 함열이다.11 그의 일생과 선도 수련기가 소설 형식으로 적힌 것이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이다. 이 글에 따르면,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던 남궁두는 거만하여 재주만 믿고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어느 날 선학(仙學)에 뜻을 두어 한 노승에게 신선술을 익혔다. 그는 큰 인내심으로 여러 단계를 잘 수행했으나 마지막 단계에서 빨리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나는 바람에 고비를 넘지 못하여 팔백 년 정도 살 수 있는 지선(地仙)에만 머물렀다고 한다. 이 소설은 『홍길동전』을 썼다고 알려진 허균(許筠, 1569~1618)이 남궁두를 직접 만나 쓴 것으로,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라는 허균의 문집 안에 실려 있다.12
  허균 역시 함열과 인연이 깊다. 그는 1611년에 함열로 유배 와서 약 1년간 거주했는데, 여러 번의 귀양살이 중 함열만큼은 특별히 요청해서 왔다고 한다.13 상당한 미식가였던 허균은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 품평서「도문대작(屠門大嚼)」(『성소부부고』 문집 안에 있음)을 썼는데, 이 책의 1611년 4월의 기록에서 “사람들이 이곳은 작은 방어와 준치가 많이 난다고 하여 유배지로 원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유배 중이지만 인심 좋게 여러 사람이 보내 주는 음식 덕분에 유배 생활을 잘 보낸 편이었다. 그리고 허균에게 있어 함열은 총 64권의 방대한 문집 『성소부부고』를 집필 완료하여 그의 문학을 집대성하고,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산실로서의 의미가 있다.14 이 책들은 사회개혁 사상과 만인 평등사상, 신선 사상 등을 담고 있다. 풍수지리에서 인걸(人傑)은 땅의 영기(靈氣)와 관련 있다고 했는데, 인물들을 통해 본 함열은 지기와 인심이 좋은 곳이었으며, 신선을 동경하고 이상사회를 꿈꾼 인물들이 태어나거나 머물던 곳이기도 했다.



지명(地名)으로 본 함열
  지명은 단순한 땅의 이름이 아니라 생명 유기체처럼 진화해온 것으로 조상들의 사상과 감정을 가장 순박하게 표현하고 있는 문화적 유산이다.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한다는 ‘명실상부(名實相符)’라는 옛말은 오랫동안 불러온 지명이 현실과 부합하는 것이 우연만은 아닐 수 있음을 알려 준다.15 함열 지역은 백제 때에는 감물아현(甘物阿縣)이었는데 757년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 전국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함열현(咸悅縣)이 되었다. 이후 약간의 변동을 거쳐 1895년 고종 때는 전주부(全州府) 함열군(咸悅郡)으로 승격되었다.16 그 당시의 군현제도에서 하나의 현이 큰 변화 없이 계속 유지되고 오히려 군으로 승격된 것은 반역이나 윤리에 반하는 사건이 없었으며 고귀한 인물을 배출했음을 뜻한다.17 이렇게 함열이란 지명은 그 땅과 더불어 천 년이란 세월을 함께해 왔다.
  글자에는 인간의 사상과 문화의 역사성이 함축되어 있어서 지명에는 사람들의 집단적인 세계관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18 특히 지명의 한자는 오랜 세월 동안 글자로 기록되고 많은 사람에게 불린 만큼 강한 기운이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함열 지명을 살펴보면, ‘함(咸)’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모두[皆也], 남김없이[悉也]로 풀고 있는데, 무기(戌)를 들고 입(口)으로 함성을 지르는 모습으로 함성은 ‘모두’가 ‘함께’ 질러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열(悅)’을 보면, 태(兌)는 사람(儿)이 벌린 입(口)에서 웃음이 퍼져나가는(八)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후 기쁘다는 심리 상태를 강화하기 위해 마음 심(心=忄)을 더한 기뻐할 열(悅) 자로 분화했다.19 그렇다면 함열은 ‘남김없이 모두 마음 깊이 기뻐한다’로 해석된다.


<그림6> 『주역』의 31번째 함괘 

백두산처럼 산 위에 못이 있는 형상으로, 산이 자신을 비워 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연못의 물이 흘러내려 산의 뭇 생명들을 키운다. 인사(人事)에서는 내 마음을 먼저 비워 타인을 포용하고 화합하는 것을 상징한다. 또 강한 양(간괘)이 자신을 낮추어 음(태괘)을 존중하고 상괘와 하괘의 각 효가 서로 음양으로 응하므로 함괘는 음양의 교감과 조화가 잘 일어나는 상이다.


 


 

나가며
  상제님께서는 함열에서 주유를 마치시고 객망리 본댁으로 돌아오신 뒤에도 신선이 모인다는 뜻을 가진 함열 회선동(會仙洞)에 있는 김보경의 집에 자주 머무르시며 여러 공사를 행하신 바 있다. 공사 3장 31절에서 상제님께서는 일본 신호(神戶, 戶: 방축 또는 방죽 호)와 어음이 같은 지명인 신방축에서 공사를 행하실 때도 직접 가셔서 지기(地氣)를 뽑는 공사를 보신 적이 있는데, 이렇게 지명의 뜻은 지기에 영향을 주는 지리, 지명 한자의 뜻과 음, 인물과도 관련될 수 있다.23
  한편, 상제님의 전국 팔도 주유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의미가 아니다.24 ‘팔도(八道)’는 우주를 공간상으로 8등분한 8방위와 연관이 있다.25 주유 끝에 하신 말씀인 “만인 함열”의 ‘만인(萬人)’도 팔도 주유가 우리나라 사람에만 한정되지 않고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서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상제님의 ‘팔도’ 주유는 ‘우주’ 주유를 뜻하므로 ‘주유천하’[천하는 하늘 아래 온 세상이라는 의미]라 부를 수 있다. ‘주유(周遊)’는 사전에서 두루 돌아다니면서 유람한다는 뜻이나, 상제님께서는 ‘인심(人心)과 속정(俗情)을 살피신 것’이므로 우주를 크게 두루 살핀다는 ‘대순(大巡)’으로 이해된다. 또한 교법 3장 19절에서 상제님께서 호둔(虎遁)하여 범의 성질을 알아보신 것처럼, 천지 대역사를 위해 인간의 몸으로 느끼며 속속들이 살피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상제님의 팔도 주유는 세계 창생을 위해 인신으로서 천하를 대순하신 것이며, 만인 함열은 창생들이 상제님의 대순과 천지공사로써 열릴 후천 세상이 너무 좋아서 모두 기뻐할 것을 암시해 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은 함열이란 지명을 부를 때 살기 좋아서 다 같이 기뻐하는 모습을 기원했을 것이고, 그 염원이 함열의 땅에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 <화평의 길>에서 상제님께서 농악을 들으며 농민들과 함께 가을 추수를 기뻐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광경을 연상하면서 상제님께서 만인 함열이라 말씀하셨던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니 상제님의 덕화가 우리 모두에게 미치고 있음이 느껴진다. 예시 80절과 81절을 보면 후천에서 백성은 원울과 탐음의 모든 번뇌가 없을 것이며 천하가 한 집안이 되고 만국이 화평하여 시기 질투와 전쟁이 끊어지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제님의 천지공사로 모든 사람이 서로 포용하고 화합하는 상생의 후천 선경이 열려 다 함께 기뻐할 날을 고대한다.






01 한철희, 『답사여행의 길잡이 1(전북)』 (서울: 돌베개, 2000), p.20 참고.
02 「금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03 김경수, 『한국지명유래집-충청편』 (수원: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2010), p.17.
04 「함열읍」,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
05 「나산괘염 터의 바리 자리에 집터를 잡은 삼 부잣집」, 『디지털익산문화대전』 참고.
06 안영배, 「함라산 줄기에 금강 물길 금상첨화… 재물도 인심도 함열이어라」, 《동아일보》 2021. 1. 30. 참고.
07 「호남가」,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단가 「호남가」는 신재효(1812~1884)의 『신재효 판소리 사설집』에 처음 전한다.
08 안영배, 앞의 글.
09 이중환, 『택리지』, 이익성 옮김 (서울: 을유문화사, 2002), pp.6-8.
10 김승대, 「오늘의 길목: 함라마을의 숨은 그림, 허균과 효정왕후」, 《새전북신문》 2021. 12. 29.
11 「남궁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남궁두가 군산 임피 출신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중환이 1751년에 쓴 『택리지』(p.80)에서도 “도교를 연구한 도사 남궁두는 함열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12 성소는 허균의 호, 부부는 장독 덮개, 고는 원고의 뜻으로,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는 장독 덮개로나 쓰일 만한 변변치 못한 허균의 글이라는 의미다.
13 김승대, 앞의 글.
14 허경진, 『허균 평전』 (서울: 돌베개, 2002), p.286 참고.
15 김기빈, 『한국 지명의 신비』 (서울: 지식산업사, 1990), p.3 참고.
16 「함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 1914년에 일제에 의한 행정 폐합으로 인해 함열은 현재 전북 익산시의 함열읍이나 함라면 함열리라는 지명으로만 남아 있다.
17 이준선 외, 『한국역사지리』 (서울: 푸른길, 2015), pp.215-216 참고.
18 최재용, 『역사와 어원으로 찾아가는 우리 땅 이야기』 (파주: 21세기북스, 2015), p.10 참고.
19 허신(許愼), 『완역 설문해자(說文解字)』, 하영삼 역주 (부산: 도서출판3, 2022), p.374, p.2398 주석 참고.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열(悅)’ 자가 나오지 않는다.
20 신라 35대 경덕왕(재위 기간 742~765)보다 100여 년 전에 『주역』을 활용한 다음의 사례를 볼 때, 함열의 지명을 지으며 『주역』도 감안했을 가능성이 있다. 31대 신문왕(재위 기간 681~692)은 『주역』의 ‘비룡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이란 구절을 따서 문무왕의 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견대(利見臺: 경북 월성군 소재)’를 세웠다.(김기빈, 앞의 책, pp.24-25)
21 『주역전의대전역해(下)』, 김석진 역해 (서울: 대유학당, 2003), p.757 참고.
22 『주역』, 「설괘전」, “山澤通氣”
23 「도전님 훈시」(1984. 11. 5) 참조.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에서 봉천명 봉신교하신 후, … 안면도(安眠島)로 가셨는데, 안면도란 편안할 안(安), 졸 면(眠), 섬 도(島)이니 잠깐 쉬어가는 데라는 말이다. …”
24 『대순성적도해요람』, p.5 참조, “상제께서 三년동안 八도(道)의 유력(遊歷)을 마치시고 고향에 돌아오셔서 …”
25 팔도(八道) 개념은 8방위에 배치된 팔괘(八卦)와도 관련이 있다. 우주만물의 모든 이치를 걸어놓았다고 해서 괘(卦)라고 하는데, 팔괘는 ‘우주의 모든 구성원’을 다 표현하므로 크게는 ‘우주’를 뜻한다.(윤상철, 『주역입문』 (서울: 대유학당, 2019), pp.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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