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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2년(2022)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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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싶은 이야기 : 아침마다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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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기도를…



양산1 방면 선무 박미자


  우리 부모님은 황해도 출신 피난민이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부산에 군인으로 근무 중이셨는데 인민군들이 국군 가족을 마구 죽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오빠가 마지막 군함이 떠난다는 말에 소달구지에 짐을 가득 싣고 항구로 가서 정신없이 배에 올랐다. 군산항에 내려 학교 교실에서 잠자며 보따리 장사로 먹고살았다. 아버지는 전역하고 군산에 황해도 피난민이 많이 산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물어물어 가족을 만났다.
  아버지는 독자다. 증조할머니께서는 매일 장독대에 물 떠 놓고 마당에 새까맣게 자식이 차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단다. 증조할머니의 그 기도가 이루어졌으니 아버지 엄마 두 분의 후사가 지금 55명의 가족을 만들었다. 어릴 적 우리 열두 식구가 아침을 먹을 때 큰 상 2개 펴고 끝에 둥그런 양은 상을 연결해 놓고 열두 그릇 밥과 큰 양푼에 가득 담은 여분의 밥을 준비했다. 반찬도 상에 가득 차렸다. 부엌엔 가마솥이 줄지어 6개가 걸려 있었고 곤로도 있었다. 엄마는 모든 부분에 솜씨가 좋으셨다.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셔서 만드는 것도 좋아하셨다. 우리 식구들은 엄마 덕분에 맛있게 잘 먹고 살았다.
  우리 동네는 교회가 세 곳, 성당이 한 곳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거의 교회에 다녔다. 크리스마스 때는 당시 귀했던 삶은 달걀, 사탕, 떡을 주니까 일 년에 한 번 교회 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김제 들판에서 절은 구경도 못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엄마는 집에 있던 신주단지를 태우고 교회를 다니셨다. 그래서 우리 집은 기독교 가족이 되었다. 언니도 교회 다니는 집으로 시집가고 여동생도 같이 교회 다니던 총각과 결혼했다. 다른 여동생들도 결혼해서 모두 교회에 다닌다. 엄마는 권사가 되셨고 형부와 제부는 교회 장로가 되었다.
  나는 30대 초반에 입도한 적이 있다. 부산에 있는 회관에 셋째딸을 데리고 자주 갔다. 도장에 가서 한복을 입고 마당에서 줄을 지어 걸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절을 했던 기억도 있다. 그때 나는 젊었고 경험이 부족했다.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으나 자존심에 내 고민을 누구에게도 의논 못 하고 이사를 하게 되었고 대순진리회도 멀어졌다.
  그 후에 교회도 다녀보고 성당에도 다녔다. 하루를 조심조심 최선을 다하며 많은 일을 겪었지만 하고 싶은 다양한 일을 하며 매 순간을 헛되게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창원 외곽에 집을 구하고 수리하던 중 저녁 먹을 곳을 찾다가 어느 카페에 가게 되었다. 그때 다시 도인을 만나게 되었다. 가정도 힘들고 사업도 힘들어 기도하며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시기였다.
  카페에서 기도를 모시고 교화를 들었다. 교화가 재미있고 귀에 쏙쏙 들어왔다. 내가 몰랐던 분야라서 새로웠다. 임원분께서 기도상을 주셨다. 내색을 못 했으나 너무 기뻤다. 사실 나는 기도상을 가지고 싶었으나 여유가 없었다. 처음 기도는 방면 임원께서 집으로 와서 같이 모셨다. 다음날부터 혼자 축시 기도를 했다.
  반찬가게를 하는 선각분 가게에 가봤더니 나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반찬가게를 해보겠다고 마음먹고 자리를 알아보았다. 준비된 돈은 없었지만, 나는 기도를 하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집 근처에 가게가 나와서 계약하고 사업자등록증을 냈다. 가게 자리를 숨겨놨다가 나에게 주는 느낌이 들었다. 중고 냉장고를 사서 가게를 열었다. 그동안 남편과 한집에 살면서 말도 하지 않고 지냈는데 개업을 하는 날 남편이 보증금을 내주었다. 가게 시작하는 날, 선각분이랑 가게에서 아침 7시에 첫 기도를 모셨다.
  나는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선감께서 자주 반찬을 사 가셨다. 오실 때마다 칭찬과 격려를 해주셔서 더욱더 힘이 났다.
  반찬가게를 운영하던 중에 코로나19가 발생했고 사업자 저금리 대출이 가능해졌다. 평상시 하고 싶었던 통오리 장작구이 가게를 하기로 마음먹고 밤새 줄을 서서 대출받았다. 6평짜리 반찬가게에서 20평짜리 가게로 이전하려고 자리를 보러 다녔다. 땅을 계약해서 조립식 건물을 지었다. 공사하는 두 달 동안 나는 부엌을 어디로 할 것인지 배관은 어디로 만들지 모든 일을 꼼꼼히 챙겼다. 방면 도인들이 물심양면 도와주셨다. 가게 페인트칠할 때도 임원분들이 오셨고 더운데 아궁이 만들어 주고 바닥에 자갈 깔고 많이 도와주셨다. 도인들의 도움으로 가게가 만들어졌다. 첫 기도를 또 선각분과 모셨다.
  한 임원분께서 손님을 모시고 자주 오셨다.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와주고 싶어 하셨다. 점심에는 가게가 가득 차는데 저녁 손님이 없었다. 위치가 외곽이고 코로나로 사람들이 움직임을 자제하니 손님이 적었다. 코로나19가 잦아지리라 예상하고 가게를 옮겼는데 재확산으로 가게가 어려워졌다.
  창원으로 새로 가게를 보던 중 한 곳이 눈에 띄었다. 전화하니 메뉴도 맘에 드는데 조건이 안 맞는다고 했다. 빈 몸으로 와서 그대로 사용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면서 목소리가 맘에 든다고 얼굴이나 보자고 했다. 다음날 가게로 찾아갔다. 보자마자 계약하자며 계약금 얼마나 걸 수 있는지 물었다. 당시 코로나19 보상금 삼백만 원이 통장에 들어온 상태였다. 나의 전 재산이었다. 다음날 계약서를 썼다. 사장님이 보증금을 얼마나 더 마련할 수 있는지 물었다. 오백은 맞출 수 있다고 하자 사장님은 한 달 여유 줄 테니 이천만 원을 만들라 했다. 나는 걱정도 안 하고 기도하며 어떻게 보증금을 만들까를 생각했다. 한 달 안에 이천만 원이 만들어졌다. 그릇, 냉장고, 기구는 전 가게에서 쓰던 것들을 가져와서 시작했다. 가게가 나를 기다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선감께서 회관 가까이 이사 와서 좋다고 하셨다. 가게가 50평이다. 회관도 가깝고 위치도 좋은 편이다. 선감께서 가게에 자주 오셔서 식사하신다. 가게에 손님이 있으면 너무 좋아하시며 최고라며 항상 칭찬 일색이다. 시작하고 보니 가게에 계속 손볼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건물이 노후하고 관리가 안 돼서 소소하게 계속 돈이 들어간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가게가 만들어졌는지…. 나의 간절한 소망이 기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선감께서 전화하셔서 먹어본 중 최고의 음식이라며 말만 아니고 진짜로 영양 가득한 음식이라고 칭찬과 격려를 하신다. 소개하고 싶은 음식점이라고 말씀하시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 선감의 칭찬과 격려가 힘을 내게 한다. 손님이 늘어 났는지도 물어보시고 앞으로 가게 앞에 손님들이 줄을 설 거라며 덕담도 하신다. 나는 식사하고 가시는 모든 분이 건강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만든다. 그리고 아침마다 기도를 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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