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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3년(2023)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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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다시 읽기 : 봉서(封書) 전수(傳受) 1

봉서(封書)  전수(傳受) 1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도주께서 다음 해 정월 보름에 이치복(호:석성)을 앞세우고 정읍 마동(馬洞) 김기부의 집에 이르러 대사모님과 상제의 누이동생 선돌부인과 따님 순임(舜任)을 만나셨도다. 선돌부인은 특히 반겨 맞아들이면서 “상제께서 재세시에 늘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음을 아뢰이니라. 부인은 봉서(封書)를 도주께 내어드리면서 “이제 내가 맡은 바를 다 하였도다.” 하며 안심하는도다. 도주께서 그것을 받으시고 이곳에 보름 동안 머무시다가 황새마을로 오셨도다. (교운 2장 13절)


  『전경』 교운 2장 13절은 도주님께서 봉서(封書)를 전해 받으시는[傳受] 기사(記事)다. 기유년(1909) 4월 28일의 만주 봉천 망명과 정사년(1917) 2월 10일의 감오득도(感悟得道)가 계시를 통해 이루어진 봉천명(奉天命) 봉신교(奉神敎)의 종통계승이라면, 1919년 1월 15일의 봉서 전수는 상제님의 유지가 밀봉된 서찰을 통해 도주님께 전해진 명실상부한 종통계승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봉천명과 봉신교가 계시를 통해 개인적이고 은밀하게 이루어진 종통계승이라면, ‘봉서’라는 실물이 도주님께 전해짐은 도주님의 봉천명과 봉신교가 여러 사람에게 공개되고 입증되는 일인 것이다. 또한 계시의 내용이 봉서로 전해진 상제님의 유지(遺志)와 여합부절(如合符節)로 일치함으로써 종통계승의 천부적인 신성성이 명확해졌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봉서 전수의 상황을 세밀하게 분석하면 그 의의를 되새길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그 이후의 도주님 행적 이해에도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번 호에서는 봉서 전수가 이루어진 시점인 기미년(1919)의 정월 보름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겠다.



다음 해(기미년, 1919) 정월
  도주님께서 봉서를 전해 받으신 날은 기미년 정월 보름으로 양력으로는 1919년 2월 15일로서 입춘[2월 5일]과 우수[2월 20일] 사이였다. 그 시기는 일제 총독부의 폭압적인 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암울한 때였던 데다가,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여겨졌던 고종마저 1919년 1월 21일에 갑자기 사망하여 3월 3일로 정해진 발인까지 장례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한민족의 명절인 기미년의 대보름은 여느 해의 대보름 명절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1907년 강제로 퇴위당하고 한일병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고종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1918년 말부터 비밀리에 망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차에 급서를 맞이한 고종을 두고,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과 증언이 빠르게 퍼졌다.01 이에 더하여 보통 국왕의 장례가 5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던 전례와 달리 고종의 장례식은 40일로 축소되었기에 항일의 분위기는 전국적으로 팽배해지고 있었다.


▲ 고종황제 대여(大輿)행렬과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모습, (1919. 3. 3.)



  한편 국외 정세를 보면, 대보름 한 달 전인 1919년 1월 18일(양력)에는 900만 군인과 600만 민간인이 희생된 1차 세계대전(1914년~1918년)의 전후 처리를 위한 강화회담이 파리에서 열렸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윌슨의 주도하에 민족 자결권에 대한 논의가 이 회담에서 본격 대두되었는데, 이러한 국제 정세는 기미년 대보름 이후 보름 뒤에 일어난 3ㆍ1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지하듯이, 3ㆍ1운동, 즉 ‘기미독립만세운동’은 전 세계의 많은 비폭력 저항 운동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고종의 죽음, 그리고 민족 자결권의 선포로 항일의 분위기가 극에 달했던 바로 그때, 해원상생으로써 후천 지상선경을 세워 세계에 영원한 평화를 이룩하려는 상제님의 유지는 ‘봉서’에 담겨 비밀리에 도주님께 전해지고 있었다. 도주님의 봉서 전수는 한반도 나아가 세계의 역사 전개와 깊은 관련을 지닌 것으로서, 실로 세상의 모든 폭력을 종식하는 상제님 대역사(大役事) 실현이 시작되는 일이었다.


▲ 삼일운동 첫날 서울에서의 만세 시위 중 한 장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월 보름
  정월 보름의 봉서 전수가 천부적인 일임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월 보름이 넓게는 동아시아, 좁게는 한국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 날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정월(正月) 보름은 동아시아에서는 상원(上元)ㆍ원소절(元宵節)ㆍ원석절(元夕節)ㆍ원야(元夜)ㆍ원석(元夕)ㆍ등절(燈節)ㆍ제등절(提燈節)이라고도 불렸다.02 상원(上元)에 대응하여 7월 보름날을 중원(中元), 10월 보름날을 하원(下元)이라고 하였는데,03 여기에서 ‘원(元)’이란 천상(天上)의 선관(仙官)이 1년에 세 차례 인간들의 선과 악을 매기는 날을 의미한다. 또한 한나라에서 최고신인 태일(太一 = 太乙)에게 천제(天祭)를 지내던 유풍에서 상원의 풍속이 유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04 이로써 정월 보름은 하늘의 최고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인간 선악을 평가하는 신선을 대접하는 날인 것을 알 수 있다.


▲ 여주본부도장 2019년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1년에 보름은 12번 이상 드는데, 한국에서 정월 보름은 ‘대보름’이라고 특별하게 불렸다. 그 이유는 해가 바뀌고 나서 첫 번째 만월을 맞이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새해 첫 만월인 데다가, 정월 초하루인 설날에 시작되었던 세수명절(歲首名節)이 대보름에 마무리되었으므로, 이날에는 특히 많은 세시 풍속이 행해졌다. 대부분 달과 관련된 개인과 집단을 위한 기원 의식인데, 개인적인 것으로는 부럼깨기, 더위팔기, 귀밝이술 마시기 등이 있고 집단적인 것으로는 농사의 풍년을 비는 줄다리기ㆍ고싸움ㆍ돌싸움ㆍ차전놀이ㆍ동제(洞祭) 등이 있다.
  전통적으로 달은 차고 기울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므로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특히 보름의 달은 가장 밝고 화려하므로 생명력의 절정으로 이해되었다. 새해의 첫 보름인 대보름은 생명력 상징의 대표였기에, 이때 달의 생명력에 의탁하여 소원을 비는 기원 의식이 생겨남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새해 처음으로 달을 향해 소원을 빌어왔던 바로 이 대보름날, 구천상제님의 봉서가 도주님에게 전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이 오랫동안 소원을 빌어왔던 날에 구천상제님의 지상선경 건설의 유지(遺志)가 봉서로 도주님에게 전해진 것은 인간의 소원인 지상선경을 가능하게 하는 진법(眞法)이 출현하였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상극과 원한 속에서 신음하며 고통받던 인간이 그토록 오래 바래 왔던 복된 세계는 이제 더 이상 막연한 신기루의 꿈이 아니게 되었다. 오랜 세월 달을 향해 빌었던 인간들의 궁극적인 소원인 지상천국 도래는 기미년 정월 대보름, 봉서가 도주님에게 전해지면서 실로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진주(眞主)를 위해 봉인된 상제님의 봉서가 도주님에게 전해졌다. 따라서 이날은 상제님을 찾으라는 명을 도주님께서 실제 이루신 날로도 볼 수 있다. 대보름은 도전님께서 양위상제님의 도를 받으신 날이기도 하다. 도전님께서는 병술년(1946) 정월 보름 이모님 댁에 인사를 갔다가 도를 얻으셨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본다면 실로 대보름은 도의 연원이신 양위상제님과 도전님 세 분이 서로 만나신 명절이다. 대보름 치성을 단순한 명절 치성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한국에서 대보름을 ‘오기일(烏忌日)’, 즉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로 여긴 것은 대보름과 종통계승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비밀이다.05 정월에는 대보름까지 날마다 연관된 동물이 있고 이에 대한 풍속이 있는데,06 한국에서 정월 명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보름을 상징하는 동물은 바로 까마귀였다.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에 의하면, 까마귀를 뜻하는 글자인 ‘오(烏)’는 까마귀의 순흑색을 나타내기 위해 새[조(鳥)]의 눈이 나타나지 않게 상형한 글자라고 한다.07 따라서 까마귀 ‘오(烏)’에 점정(點睛), 즉 눈을 그려 넣으면 새 ‘조(鳥)’가 된다. 즉 오(烏)는 조(鳥)의 하나로 순흑색의 의미가 더해진 글자이다. 순흑색[黑]은 1ㆍ6수를 상징하고, 1ㆍ6수는 연원(淵源)을 상징하니, 오(烏)는 결국 1ㆍ6수의 새, 즉 연원(淵源)의 조(鳥)가 된다. 도전님께서는 상제님께서 동곡약방 남쪽 기둥에 새긴 글이 봉황 ‘봉(鳳)’자이며, 봉은 을(乙)과 조(鳥)가 되어 을미생 조씨인 도주님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대보름을 상징하는 까마귀는 연원과 조씨의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보름날에 봉서 전수가 이루어진 것 또한 여합부절의 이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대보름에 귀밝이술, 즉 이명주(耳明酒)를 먹는 풍습은 단순히 귀가 잘 들리게 해달라는 기원을 담은 것만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이야기 중 상제님의 유지를 계승하여 진법을 세우신 도주님의 대도를 구별하여 귀의하기 위해서는 귀가 밝아야 한다는 사실을 신명들이 풍속을 통해 알려준 것이리라. 귀가 밝다는 것은 ‘총명(聰明)’의 ‘총(聰: 귀밝을 총)을 의미한다. 즉 진주이신 도주님의 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귀가 밝아[총(聰)] 종통계승의 소식과 이치를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기에 정월 보름에 귀밝이술을 먹도록 하는 풍습을 신명들이 알려주었다는 뜻이다.
  신비하게도 무극도 시기에는 귀밝이술, 즉 이명주(耳明酒)의 ‘이명(耳明)’ 뜻을 가진 ‘명이주(明耳呪)’라는 주문을 외웠다. 명이주는 “천지에 빛이 들면[天地昇光] 지지(地支)와 일월이 밝아지듯이[地支昇曠 日月昇曠], 주문을 열면[開呪] 귀가 열리고 밝아져서[開耳 耳曠], 소리를 듣고[耳邊有聲] 인의(仁義)에 속히 통하도록[速通] 해주소서”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08 대보름에 마시는 귀밝이술도 우리를 총명하게 해주겠지만 진실로 인의에 통하게 해줄 진정한 이명주(耳明酒)는 연원이신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께서 내려주신 주(呪)이며 곧 진법일 것이다.






01 고종의 망명과 독살설 및 3·1운동에 대해서는 김종욱, 「국가와 시민사회의 항일연합항전: ‘패치워크 역사 접근방법’을 통한 3·1운동의 재해석을 중심으로」, 『시민사회와 NGO』 17-1 (2019), pp.119-128 참조.
02 ‘상원(上元)’ 한국민속대백과사전(https://folkency.nfm.go.kr) 참조.
03 『자치통감(資治通鑑)』 「당(唐) 희종기(僖宗紀) 호삼성(胡三省)」 주(注)에 “도가(道家)의 책에는 정월 15일을 상원(上元)으로 하고, 7월 15일을 중원으로 하며, 10월 15일을 하원으로 여긴다. [道書以正月十五日爲上元 七月十五日爲中元 十月十五日爲下元]”라고 하였다.
04 “『사기(史記)』 「악서(樂書)」에 한나라는 태일신(太一神)을 제사 지낸다. 저녁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 이어진다고 하였는데 지금 정월 대보름 밤에 관등놀이를 하는 것은 그때의 유풍이다(史記樂書曰漢家祀太一 以昏時祠到明 今人正月望日 夜游觀燈 是其遺事).” 서견(徐堅), 『초학기(初學記)』;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사기』 「악서」에서 말하기를 ‘한나라 때는 태일신을 제사 지낸다고 하고 이는 저녁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 이어진다고 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정월 망일(대보름) 밤에 관등놀이를 하는데 이는 그때의 유풍이다’ 하였으나 지금의 『사기』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다.” 홍매(洪邁), 『용재삼필(容齋三筆)』 「상원장등(上元張燈)」.
05 ‘오기일(烏忌日)’의 유래는 까마귀가 신라 소지왕을 인도하여 위급을 면하게 했고, 그 후로 매년 첫 번째 보름에 까마귀에게 찰밥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전설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 사금갑조(射琴匣條)에 나타나 있다. 까마귀는 오래전부터 반포(反哺), 즉 새끼가 자란 뒤에 늙은 어미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 준다고 알려져 효도를 행하는 효조(孝鳥)로 불렸다. 칠월 칠석에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해주었던 오작교는 까마귀들이 만든 하늘의 다리이고, 삼족오, 즉 다리가 3개 달린 까마귀는 태양의 양의 정기가 뭉친 새로 전해진다. 오래전부터 까마귀는 도리를 아는 상서로운 천상의 새였던 것이다. 이외에도 까마귀가 인간의 수명이 적혀있는 적패지(赤牌旨)를 지상에 전하는 역할을 했다는 전설도 있다. 동아시아, 특히 한국에서 까마귀는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메신저였다.
06 한국에서는 정월의 첫 12지지에 해당하는 날을 ‘상○일’ 또는 ○날로 불렀고 해당 지지의 동물과 관련된 풍속이 있었다. 또한 7일은 인일(人日)로 사람과 관련된 풍습이 있었다. 정월의 동물과 관련된 풍습은 동아시아에 공통적인데 그 기원은 오래되었다. 동방삭 점서(東方朔占書)에는 ‘정월 초하루를 닭날[鷄日], 둘째 날은 개날[犬日], 셋째 날은 양날[羊日], 넷째 날은 돼지날[猪日], 다섯째 날은 소날[牛日], 여섯째 날은 말날[馬日], 일곱째 날은 사람날[人日], 여덟째 날은 곡식일[穀日]이라 하며, 해당되는 날이 청명하면 그 생물이 잘 생육하고, 흐리면 재앙(災殃)이 든다.’라는 기록이 있다.
07 鳥字點睛, 烏則不, 以純黑故不見其睛也
08 明耳呪 天地昇光 地支昇曠 日月昇曠 開呪 開耳 開呪 耳曠 耳邊有聲 速通人義 唵喼喼如律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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