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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 선천에는 108염주, 후천에는 105염주

선천에는 108염주, 후천에는 105염주



차선근(대진대학교 대순종학과 교수)



“선천에는 백팔 염주였으되 후천에는 백오 염주니라.” (예시 77절)


  『전경』을 읽다 보면 그 의미를 헤아리기 힘든 성구가 종종 나온다. 예시 77절의 상제님 말씀도 그 가운데 하나다. 필자는 어디선가 108염주는 108개의 하늘을, 105염주는 105개의 하늘을 의미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또는 108이나 105를 작은 숫자로 쪼개어(인수분해)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사람도 보았다. 그들의 말들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들이 진실임을 입증할 방법은 없다. 또한 그 말들의 의미를 이해할 방법도 없다. 따라서 그런 말들은 근거가 없기에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재 시점에서 상제님의 위 말씀을 정확하게 해설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글로 옮기려는 이유는, 동학 계열 교단들이 주장하는 105염주의 의미가 우리의 후천 105염주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며, 또한 그들과는 다른 우리 나름의 해설 초안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다. 이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동학 계열 교단들이 설명하는 105염주의 의미
2. 염주와 108의 상징
3. 105의 상징
4. 후천의 105염주


  1. 동학 계열 교단들이 설명하는 105염주의 의미


  동학은 최제우의 죽음 이후 최시형, 손병희를 구심점으로 명맥을 이어가면서도 여러 분파를 낳았다. 익히 잘 알려진 천도교 외에 동학천진교, 수운교, 동학회중앙본부, 동학교본부, 시천교 등이 그런 교단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주문을 외울 때 105염주를 활용한다.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전봉준도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전주성으로 진격할 때 백립(白笠)ㆍ백의(白衣)를 걸치고[父親喪] 손에는 105염주를 들고 입으로는 삼칠주(三七呪)를 외웠다고 하니,01 동학의 후예들이 105염주를 쓴 것은 꽤 오래된 일이었던 같다.




  이들이 105염주를 사용하는 까닭은, 8자의 강령주문(降靈呪文)인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과 13자의 본주문(本呪文)인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를 합친 숫자 21에 오행의 수 5를 곱한 수가 105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는 사대칠성(四大七星)이 거느리고 있는 별자리 수, 즉 북두7성 28, 남두6성 21, 동두5성 15, 서북8성 36을 모두 더한 100을 기본으로 삼아서, 선천에는 여기에 8방의 숫자를 더해 108염주가 되고, 후천에는 5행의 숫자를 더해 105가 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02
  그러나 이 설명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서 후천에는 105염주가 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다.
  첫째, 21자 주문(강령주문과 본주문) 글자 수에 오행의 숫자 5를 곱한 것이 105라는 설명은, 선천에 108염주였던 것이 후천에는 105염주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려주지 못한다. 21자 주문이 상제님께서 최제우에게 내리셨던 계시를 통해 세상에 나타난 것이기는 하지만, 상제님께서는 ‘이미 행세된’ 21자 주문 대신 태을주를 쓴다고 하셨음을 상기해야 한다.03 그렇다면 우리의 관점에서는 105염주가 21자 주문이 아닌 23자의 태을주 상징으로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23(또는 19)으로 105를 풀이할 적당한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둘째, 몇몇 동학 후예들이 별의 수에 근거를 두고 한 105염주 해설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북두칠성의 숫자가 28이라는 것부터가 사실이 아니다. 주지하듯이 북두칠성의 수는 7 또는 9(북두구성으로 확장한 경우)이다. 아마 그들은 28수를 동서남북의 구역으로 나누어 부르는 명칭, 그러니까 북방칠수ㆍ동방칠수ㆍ남방칠수ㆍ서방칠수를 북두칠성으로 잘못 호칭한 것 같다. 남두육성의 별 숫자도 21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6이며, 동두오성도 별의 수가 15가 아니라 5다. 그들은 서북8성 36이라고 했는데, 서북8성은 동양 천문에 없는 별자리다. 추정하자면 서두팔성(혹은 서두십팔성, 서두사성)을 잘못 말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별의 개수는 36이 아니라 8(또는 18이나 4)이다. 전통적으로 한국 민간에서는 북쪽 대표 별자리를 북두칠성, 남쪽 대표 별자리를 남두육성(28수 중 斗宿), 동쪽 대표 별자리를 동두오성, 서쪽 대표 별자리를 서두팔성(서두십팔성, 서두사성)으로 불러왔는데, 몇몇 동학 후예들은 이것을 사용해서 105라는 숫자를 맞추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네 방위의 별 수를 모두 합쳐도 ‘7(북두칠성) + 6(남두육성) + 5(동방오성) + 8(서두팔성)’해서 26밖에 되지 않는다. 북두칠성 자리에 7 대신 28, 서두팔성 자리에 8 대신 18을 바꾸어 넣더라도 별들의 숫자 총합은 57에 지나지 않아 100을 만들 수 없다. 설령 어찌어찌해서 별들의 숫자를 100개로 맞추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선천에는 거기에 8방위의 8을 더해서 108이 되고, 후천에는 거기에 오행의 5를 더해서 105가 된다는 식의 설명으로는 ‘선천과 후천을 대비한 염주’의 의미를 밝히지 못한다.
  동학 계열 교단들은 105염주를 사용한다. 거기에는 그들 나름의 이유나 사정이 있을 것이고, 또 만족스럽지 않으나 그에 대한 설명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들은 상제님께서 ‘선천에는 108염주, 후천에는 105염주’라고 대비시키셨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고, 다소 부족하더라도 우리 나름의 해설이 필요한 이유다.



2. 염주와 108의 상징


  염주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염주가 불교만의 고유한 물품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말해야 하겠다. 염주(念珠)란, 주문이나 신의 이름(예를 들어 아미타불) 또는 경전을 읊을 때[念] 그 횟수를 세기 위해 사용하는 구슬[珠] 묶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염주는 수주(數珠), 송주(誦珠), 주주(呪珠)라고도 불린다. 염주는 기도하거나 주문 읽을 때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선물용이나 장식용으로도 사용되었고, 잠이 오지 않을 때 만지작거림으로써 불면을 극복하거나 사회적 신분의 고하를 나타내는 용도로도 쓰였다.04 그래도 정해진 숫자의 구슬을 꿴 것이니만큼, 주된 용도는 숫자 세기라고 해야 한다.
  염주는 불교의 대표적인 종교 도구 가운데 하나로 알려졌지만, 원래는 브라만교ㆍ힌두교 같은 인도 종교에서 먼저 사용되었고, 그것을 다른 종교들도 가져다 쓴 것이다. 그러니까 염주는 불교와 같은 특정 종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주문이나 경전ㆍ기도 문구를 암송할 때 그 횟수를 세는 데 신경 쓰지 않기 위해서는 염주 모양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편리하기에 여러 종교가 염주를 이용한다. 그래서 힌두교에서는 자파말라[Japamala: 알이 108개. 말라(Mala)라고도 함]를, 가톨릭에서는 묵주(默珠: 알이 10개, 50개, 150개 등)를 손에 쥔다. 이슬람에서도 기도문을 읽을 때 수브하[Subha: 알이 33개, 66개, 99개 또는 100개. 타스비흐(Tasbih), 미스바하(Misbaha)라고도 함]를 사용하고, 대종교에서도 단주(檀珠: 알이 12개, 36개, 72개 등)를 쓴다. 동학 계열 교단들에서도 염주 알의 수를 105개로 하여 사용하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염주를 사용하는 종교들은 저마다의 숫자를 사용하여 염주 알의 수를 정한다. 그리고 그 숫자는 각 종교의 교리ㆍ세계관에 대한 상징을 담고 있다. 즉, 염주는 고정된 하나의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언제든 다른 뜻을 담아낼 수 있는 ‘텅 빈 기호’다. 그러므로 염주 알의 숫자를 살피는 것은 그 염주를 사용하는 종교의 사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불교도 염주를 사용한다. 그런데 그 종류가 여럿이다. 14염주, 21염주, 27염주, 42염주, 54염주, 108염주, 심지어 1080염주까지 있다. 이 가운데 대표로 인정되는 것은 108의 염주다. 그러면 불교는 염주 알의 수를 108개로 함으로써, 다른 종교와는 구별되는 그만의 어떤 독특한 상징을 담고자 하였는가? 이에 대한 답은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북방불교에서 108은 번뇌의 숫자, 또는 그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과 삼매(三昧)의 숫자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번뇌에는 108개가 있고, 그 번뇌들은 많은 악업(惡業)을 만들어내니[108結業], 구슬 108개에 108의 번뇌를 하나씩 담아 각각의 구슬에 구멍을 뚫음으로써 번뇌를 멸하여 108삼매의 경지에 든다는 것이다. 또는 108의 번뇌를 씻고 마음을 비우기 위해 108의 절[百八拜]을 올리거나 108의 공덕을 쌓아 108의 삼매에 들기도 한다. 그러한 108의 삼매는 만다라(滿茶邏)에서 108의 신들[百八尊]로 형상화하여 묘사되기도 한다. 절을 하든, 공덕을 쌓든, 삼매에 들든, 부처나 신으로 화하든 간에 그 모두는 수행의 과정과 도달해야 할 경지를 상징한다. 수행은 일체개고(一切皆苦)를 가져다주는 번뇌를 없애는 게 목적이다. 따라서 북방불교 맥락에서 108은 세상의 모든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고 덕을 쌓으며 높은 경지의 수행에 매진함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사찰에서 아침저녁으로 범종을 108회 타종하는 이유는 덜 깬 잠이나 미혹함을 떨치고 108의 번뇌를 씻어내고자 하는 목적이라고 설명되지만, 108이 월ㆍ절기ㆍ절후의 숫자를 상징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그러니까 북방불교에서 108은 12월ㆍ24기(氣)ㆍ72후(候)를 합친 숫자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곧 1년을 의미하는 숫자이기도 하다.05
  셋째, 남방불교는 붓다가 특정 지역을 방문하면 바닥에 연꽃 문양 등의 발자국이 새겨진다고 보고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데, 이 ‘불족적(佛足迹)’을 ‘걷는 붓다(walking Buddha)’라는 108의 길상(吉祥, maṅgala)으로 해석한다. 북방불교가 만사를 ‘고(苦)’로 설명하는 불교의 기본 사상 속에서 108을 번뇌인 흉(凶)과 그것에 대한 극복을 상징한다면, 남방불교의 108은 길(吉)과 그것에 대한 숭배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정반대의 해석을 보인다.06
  정리하자면, 불교 108의 염주로 읽을 수 있는 불교의 상징은 번뇌를 없애고 공덕을 쌓아 삼매에 드는 수행, 불법의 중심이 되는 불보살, 1년의 운행 법칙, 그리고 부처의 신성한 발자취 등이다. 이를 다시 한 문장으로 압축하자면, 선천의 108염주는 1년 단위로 돌아가는 거대한 우주의 운행과 인간의 삶 속에서 번뇌를 제거하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공덕으로 삼매에 들어 부처가 됨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는 염주 알의 수를 108개로 맞춤으로써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염주를 사용하는 종교는 염주 알의 숫자에 자신의 사상과 세계관을 담아낸다. 염주는 텅 빈 기호이기 때문에, 알의 숫자가 다르다면 그 염주의 의미도 달라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각 종교는 저마다의 독특한 숫자의 알로 구성된 염주를 사용한다. 그러면 상제님께서 염주 알에 105라는 숫자를 붙이셨다면, 그 염주에는 상제님께서 뜻하시는 다른 그 어떤 뜻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105의 염주는 불교가 108의 염주로써 상징하고자 한 것과는 다른 그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3. 105의 상징


  1) 동지한식백오제(冬至寒食百五除)
  105의 의미를 읽기 위해서는 우선 상제님께서 외워두라고 하셨던 ‘삼인동행칠십리(三人同行七十里) 오로봉전이십일(五老峰前二十一) 칠월칠석삼오야(七月七夕三五夜) 동지한식백오제(冬至寒食百五除)’07 라는 글귀부터 살펴야 한다. 바로 칠언절구의 이 한시에 ‘105’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한시는 원래 미지의 숫자를 찾아내는 가결(歌訣) 혹은 구결(口訣)이었다. 요즘 학생들이 공부할 때 외워야 할 복잡한 지식을 노래 가사로 만들어 익히곤 하듯이, 옛날 전통 시대에도 수학 공식을 머릿속에 넣을 때는 한시를 만들어 외우곤 했는데, 이 한시도 그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다.08
  이 수학 공식은 어떤 모르는 수를 알고 싶을 때 그것을 찾는 방법을 말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첫째 단계가 ‘삼인동행칠십리(三人同行七十里)’다. 이 글귀는 미지의 수 를 3으로 나누고 그 나머지에 70을 곱하라는 의미를 담아 외우도록 만든 것이다. 둘째 단계는 ‘오로봉전이십일(五老峰前二十一)’로서, 미지의 수 를 5로 나누고 그 나머지에 21을 곱하라는 뜻이다. 셋째 단계는 ‘칠월칠석삼오야(七月七夕三五夜)’로서 미지의 수 를 7로 나누고 그 나머지에 3×5=15를 곱하라는 의미다. 넷째 단계는 ‘동지한식백오제(冬至寒食百五除)’다. 이 말은 동짓날부터 105일째 되는 날을 헤아려 한식일로 잡는 관행을 이용한 공식으로서, 앞선 세 단계에서 각각 나온 3가지 종류의 숫자들을 다 더하고, 거기에서 105를 빼라는 뜻을 가진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가 바로 찾고자 하는 수 가 된다.09
  예를 들어 본다. 하나의 군대를 편성하기 위하여 여러 마을의 장정들을 소집했는데, 몇 명이 모였는지 몰라 이를 알아야 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가장 먼저 할 일은 모인 장정들을 세 열로 서도록 만드는 것이다(3으로 나눈다). 그랬더니 2명이 남았다. 이 나머지 2에 70을 곱하면 140이 된다. 다음 단계는 이 장정들을 다섯 열로 서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랬더니 4명이 남고 여기에 21을 곱하면 84가 나온다. 다음 단계는 장정들을 일곱 열로 세우는(7로 나누는) 것인데 그 열에 들어가지 못하는 5명이 나오자 그 숫자에 15를 곱해 75를 구한다. 각 단계에서 나온 숫자들인 140, 84, 75를 합한다. 그러면 299가 나온다. 이 합은 기본 단위인 105를 넘어가므로 105 이하의 수가 나오도록 105를 여러 번 뺀다. 이 경우에는 105를 두 번 빼면 되는데, 그러면 89가 나온다. 따라서 모인 장정들의 수는 89명임을 확인할 수 있다.10

  이처럼 모르는 숫자를 알고 싶을 때 그 숫자를 3, 5, 7로 각각 나눈 나머지에 일정한 수를 곱하고 모두 합한 후에 105를 제하는 공식은 흔히 ‘한신점병(韓信點兵: 한신이 병사 수를 세는 방법)’ 또는 ‘나머지 정리’로 알려져 있다. 상제님께서 외우라고 하셨던 칠언절구 한시도 원래의 의미는 이것이었다. 이 원리는 대략 4세기 무렵의 서적인 『손자산경(孫子算經)』에 전할 정도로 오래되었다.11
  상제님께서 이 수학 공식을 왜 전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수학 공식은 기문둔갑 연구자들 사이에서 ‘영산수(靈算數)’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태극도 시절부터 수도를 이어온 원로 임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도주님께서 시학과 시법 공부 자리를 짜실 때, 처음에는 그 공부 자리를 도인들이 한번 만들어보라고 시키셨다고 한다. 도인들이 연구를 거듭했으나 공부 자리를 짤 수 없어 그 어려움을 고하자 도주님께서 ‘여기 앉아서 저 멀리 보이는 옥녀봉 산 위의 소나무 솔잎 숫자를 정확히 헤아릴 수 있을 정도라야 공부 자리를 짤 수 있다. 그러려면 영산수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12 옥녀봉 꼭대기 소나무 솔잎의 수는 찾고자 하는 미지의 수 이고, 이것을 파악하는 방법의 일단은 상제님께서 외우라고 하셨던 칠언절구에 전한다.
  물론 우리는 칠언절구만으로는 옥녀봉 소나무 솔잎의 수를 알아낼 수 없다. 실제로 솔잎의 수를 세고자 한다면 3ㆍ5ㆍ7로 각각 나눈 나머지들을 알아야 하고, 각 나머지의 곱과 합에서 105를 몇 번 빼야 하는지도 알아야 하는데, 칠언절구는 이 방법까지 전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알려지지 않는 이 방법은 팔문둔갑[奇門遁甲]의 작주법(作籌法)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13 상제님께서도 그것을 몸소 보여주신 적이 있으셨지만,14 구체적인 시행 방법은 확인할 수 없다. 미지의 숫자를 알아내는 영산수가 시학과 시법의 공부 자리를 어떻게 짤 수 있는지도, 현재로서는 그 원리를 알 수 없다. 도전님께서는 시학과 시법이 후천의 연월일시분초각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하셨고,15 그 각각의 시간은 숫자로 표시되므로, 여기에 영산수가 일정한 역할을 할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어쨌든 상제님께서 전하신 칠언절구는 미지의 수 를 찾는 것이고, 그것은 영산수로서 후천을 짜나가고 개벽하면서 도통에 도달하는 공부인 시학ㆍ시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의 주제로 다시 돌아오면, 이 칠언절구가 말하는 기본 단위가 105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칠언절구 수학 공식은 ‘동지한식백오제’ 즉 105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서 미지의 수를 파악하는 것이다. 만약 105보다 큰 수를 찾고자 한다면, 기본 단위가 105이므로 105를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빼야 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존재하는 것’을 ‘숫자’로 표기한다고 할 때, 그것을 파악하고 확인하는 기본 단위가 105라는 것이다. 동양의 상수학에서 105는 존재의 기본 단위라는 뜻인데, 그렇다면 105가 존재의 기본 단위가 되는 원리는 무엇인가?



  2) 105는 토(土)의 상징
  만물은 나고 자라고 성숙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것을 원형이정(元亨利貞) 또는 생장염장(生長斂藏)이나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하고, 계절로 표기하면 춘하추동(春夏秋冬), 오행으로 표기하면 목화금수(木火金水)가 된다. 오행을 상수학의 숫자로 나타내면 목(木)이 3ㆍ8, 화(火)가 2ㆍ7, 금(金)이 4ㆍ9, 수(水)가 1ㆍ6이다. 만물이 이러한 양태로 순환 운동하려면 그 각 활동을 조정ㆍ중재하는 중심이 필요한데, 이것을 오행에서는 토(土)라고 한다. 숫자로 보면 토(土)는 5ㆍ10이다. 그러므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도 그 중앙에 5ㆍ10 토를 두어 순환의 중심을 표시한다. 만물의 운행과 변화를 조절ㆍ통제함, 즉 다스림을 주관함은 곧 5ㆍ10 토에 있다는 뜻이다. 5ㆍ10 토는 흔히 숫자 ‘15’로 표기된다. 그래서 하늘도 각 구역과 구역 사이에 15°(5+10)씩 간격을 두어 24개의 방위를 만들고, 절기와 절기 사이에도 15(5+10)일씩 간격을 두어 24개의 절후를 만든다. 도장에서 대원종(大願鍾)을 타종할 때 진시(辰時)ㆍ술시(戌時)ㆍ묘시(卯時)ㆍ유시(酉時)의 종운(鍾韻) 가운데 ‘15의 원리가 진(眞)ㆍ진법(眞法)ㆍ진리(眞理)’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16 바로 이 원리에 기초하여 영대의 신위도 15위가 되고, 배례도 15회가 됨은 도인들이 이미 다 아는 내용이다.17
  ‘15’가 만물의 순환과 변화의 중심이라면, 앞서 말한 존재의 기본 단위인 105와도 어떤 관련성을 가질 것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감지할 수 있는지 없는지와는 상관이 없이, 대개 만물은 움직이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만물의 존재성과 운동성이 별개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105가 15를 어떻게 품고 있는지 확인하려면, 105를 15로 나누어보면 된다. 그러면 7이 나온다. 만물의 운동을 의미하는 15가 7개 모이면 105가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만물의 존재성(105)과 운동성(15) 사이에는 7이라고 하는 숫자가 매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만물의 존재성과 운동성을 왜 7이 매개하는가? 이를테면 6이나 8, 9는 안 되는가? 이 글은 이에 대한 힌트가 7을 대표하는 별자리인 북두칠성에 있다고 본다. 주지하듯이 북두칠성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돌아다니면서 천제인 북극성의 명령을 각 지방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하늘 임금께서 펼치시는 각종 인사(人事)와 명령, 나아가 인간의 운명과 복록까지도 각 지방과 인간에게 빠짐없이 배달해주는 우체부이자 심부름꾼이 북두칠성이다.18 천제의 지엄한 명령을 전달하여 그 효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이 북두칠성이라면, 7은 특정 원리나 명령 또는 존재 자체를 실현ㆍ구체화하는 일종의 ‘동력원’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7이 오행 가운데서도 ‘뻗어나감’을 상징하는 화(火)에 속하고, 2의 음화(陰火)보다 상대적으로 더 기운이 강한 양화(陽火)라는 사실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천제의 명령이든 만물의 존재든, 어떤 그 무언가가 실체화되고 구현되는 데 필요한 것이 7이라는 사고방식은 세계 곳곳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면 구약 창세기에서 신이 창조와 휴식으로써 인간을 포함하는 만물의 실체를 이루는 데 7일이 걸렸다고 하며, 불교 문화권에서도 중유(中有)라 하여 7의 7이 되는 날인 49일째 망자가 다시 인간 세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도 갓난아기가 3의 7일(三七日)이 지난 후라야 부정과 출입을 금하는 금줄을 걷고 외부 손님을 받았던 풍습은 인간이 실체를 갖추는 데 7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일본에서도 아이가 7살이 되어야 비로소 ‘살아있는 인간’으로 인정하는 습속[七つ前は神のうち]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도 우주가 7이라는 숫자 속에서 구현된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신이 3을 상징하고(우주의 기본 원리라고 생각한 그의 정리도 직각삼각형에 대한 것이다), 그 3의 신은 4방[東西南北]으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라고 한다.19
  이러한 7의 상징성(만물의 존재를 실재로 만들어내는 힘)을 고려한다면, 만물의 존재성을 상징하는 105와 만물의 운동성을 상징하는 15 사이에 숫자 7이 존재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5ㆍ10 토의 상징을 담은 15는 운동과 변화의 중심을 나타내며, ▲그 변화와 운동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신명계의 중심도 15신위이고, ▲15가 상징하는 변화ㆍ운동ㆍ다스림이 사방에 뻗어나가 효력을 발휘하고 만물의 실재를 구체화하려면 7이 필요한데, ▲15가 7을 만나면 드디어 만물의 존재성이 실현되니, ▲그 결과 그 존재의 기본 단위는 15×7인 105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4. 후천의 105염주


  105는 15×7, 즉 5ㆍ10 토를 7로써 실체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 숫자가 후천 법수(法數)로 채택될 때는 5ㆍ10 토 그 자체만 상징하는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 5ㆍ10 토인 15의 수리는 낙서에도 나타나는 만큼 선천에도 있었던 것이고, 그렇다면 그러한 상징의 105는 후천의 염주가 아니라 선천의 염주에도 채택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05가 후천 염주의 상징으로 쓰이려면, 선천에도 있었던 토의 작용 외에 후천과 관련이 되는 다른 그 무엇이 반드시 들어가야만 한다.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영산수, 즉 시학ㆍ시법으로써 짜나가는 후천 세계였다.
  후천 105염주의 또 다른 상징은 상제님께서 세우신 신명계의 신단(神壇)인 15신위에도 있는 듯하다. 15신위는 5ㆍ10 토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나 원래 선천에는 없었던 것이다. 신명들의 하소연을 들으신 상제님께서는 5ㆍ10 토를 신명계 구성의 기본 원리로 삼으시고, 도주님으로 하여금 15의 신위로써 영대의 신단(神壇)을 구성토록 하셨다. 선천에도 5ㆍ10 토의 원리가 만물을 주관하였으나, 이 수리가 상제님을 중심으로 한 신명계[神壇] 원리로 사용되는 것은 선천이 아니라 후천의 일을 말한다.
  이제, 복잡했던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각 종교에서 사용하는 염주는 그 알의 숫자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염주를 사용하는 종교는 자신의 염주에 자신의 모습을 담아낸다. 선천의 108염주는 불교의 사상과 세계관을 품은 것으로서, 부처가 되기 위해 번뇌를 떨치고 공덕을 쌓으며 수행하거나 혹은 불법(불보살)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 변화 원리(1년 운행 법칙), 부처의 신성함을 상징한다. 이에 비해서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후천의 105염주는 후천의 일을 말하는 것으로서, 5ㆍ10 토를 기본으로 하는 15신위가 7로써 실체화되고, 후천을 짜나가는 시학ㆍ시법을 가능하게 하는 영산수인 105의 상징을 담았으니, 15신위에 대한 신성성과 공경 그리고 연월일시분초로 정해지는 후천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글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현재 시점에서 후천 105염주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설이 가능하겠지만, 이를 확인해 줄 수 있는 분이 없는 까닭이다. 이 글은 단지 동학 계열 교단들의 105염주 해설이 우리와는 맞지 않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우리의 105염주 해명에 대한 하나의 가설을 임시방편으로 세워보고자 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 이 글의 설명도 그저 참고 사항 정도로만 읽히기를 바란다.





01 “白笠白衣(丁父喪)手指百五數珠口誦三七聖呪 ….” 최류현, 『侍天敎歷史』 (京城府: 侍天敎總部, 1920), pp.152-153.
02 이찬구, 「동학수운교의 수행에 관한 고찰」, 『신종교연구』 13 (2005), p.28.
03 종도들이 모인 곳에서 상제께서 三월 어느 날 가라사대 “지금은 신명 해원시대니라. 동일한 五十년 공부에 어떤 사람을 해원하리오. 최제우는 경신(庚申)에 득도하여 시천주를 얻었는 바, 기유(己酉)까지 五十년이 되니라. 충남 비인 사람 김경흔은 五十년 공부로 태을주를 얻었으되 그 주문을 신명으로부터 얻을 때에 그 주문으로써 많은 사람을 살리라는 명을 받았느니라.”고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이 두 사람 중의 누구를 해원하리오.”라고 물으시니, 시좌하고 있던 종도들 중에서 광찬이 “상제님의 처분을 기다리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시천주는 이미 행세되었고 태을주를 쓰리라.” 하시고 읽어 가르치시니 그 주문은 이러하였도다. 吽哆吽哆 太乙天上元君 吽哩哆㖿都來 吽哩喊哩娑婆啊. 교운 1장 50절.
04 John Kieschnick, The Impact of Buddhism on Chinese Material Cultur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3). pp.129-137.
05 김길상(편), 『불교대사전』 (서울: 홍법원, 2011), p.787.
06 강대공, 「번뇌(煩惱)와 길상(ma˙ngala)을 통해 본 108법수의 기원과 발전」, 『인도철학』 39 (2013), pp.171-199.
07 예시 85절.
08 김탁, 「증산 강일순이 인용한 한시 연구」, 『한국종교』 19 (1994), pp.88-98.
09 차선근, 「기문둔갑, 그리고 강증산의 종교적 세계」, 『종교연구』 77-3 (2017), p.207.
10 사실 89명은 최소 인원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모인 장정은 89명일 수도 있고, 거기에 105씩 더해 나간 194명, 299명, 404명, 509명 등이 될 수도 있다.
11 今有物, 不知其數. 三三數之, 賸二. 五五數之, 賸三. 七七數之, 賸二. 問物幾何, 答曰二十三. 術曰三三數之, 賸二, 置一百四十. 五五數之, 賸三, 置六十三. 七七數之, 賸二, 置三十. 并之, 得二百三十三, 以二百一十減之, 即得. 凡三三數之, 賸一, 則置七十五. 五五數之, 賸一, 則置二十一. 七七數之, 賸一, 則置十五. 一百六以上, 以一百五減之, 即得. 『孫子算經』 「卷下」.
12 2010년 11월 27일 여주본부도장 종무원 2층 회의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13 차선근, 「기문둔갑, 그리고 강증산의 종교적 세계」, p.207 참조.
14 상제님께서 줏대로써 동네 호구와 남녀 인구 숫자를 계산하는 방법을 몸소 보여주셨던 것은 작주법과 관련이 있다. 도주님께서도 작주법을 쓰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권지 1장 14절, 교운 2장 40절.
15 “하루에 시학원 1명, 정급 2명, 진급 3명, 정원 6명, 외수ㆍ내수 24명이다. 도통이 다른 게 아니다. 인신상합(人神相合)이다. 이것이 도통이다. 날도 음일(陰日)ㆍ양일(陽日)이 있다. 하루 24시간인데 내수 12명, 외수 12명이 시를 맡는다. 연월일시분초각 층층이 있다. 상재(上才)ㆍ중재(中才)ㆍ하재(下才)가 그것과 다른 게 아니다. 책임자는 하루, 정급은 각각 주야(晝夜)를 맡는다.” 『도전님 훈시』(미발행), 기사년 5월 19일(양력 1989.6.22).
16 鐘聲이 幾何오 十五相續이라 其理如何오 八卦相盪하고 九宮成數로다 縱橫運用하여 十五成眞이라 眞法如是하니 是曰眞理로다.
17 차선근, 「조석(潮汐)의 이해」, 『상생의 길 1』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04), pp.149-161; 차선근, 「대순진리회 상제관 연구 서설 (Ⅱ)」, 『대순사상논총』 23 (2014), pp.243-252 참조.
18 차선근, 「칠성주의 문곡과 육순」, 《대순회보》 237 (2020), p.82.
19 飯島吉晴, 「聖数「七」のフォークロア」, 『古事 : 天理大学考古学·民俗学研究室紀要』 13 (2009), pp.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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