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54년(2024) 5월

이전호 다음호

 

도전님 훈시 종단소식 전경 성구 울타리 고전 에세이 대순광장 대순포커스 정심원 도장 둘러보기 지방 회관 소개 전경 속 이야기 생각이 있는 풍경 영화 속으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 알립니다

전경 속 이야기 :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동남풍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동남풍



교무부 곽춘근


▲ 「한국 해협에서 러시아 군함 “보로디노(BORODINO)”가 파괴되었다」, 쓰시마 해전에서 침몰 위기의 러시아 군함,『러·일 전쟁의 긴박한 이야기(THRILLING STORIES RUSSIAN-JAPANES WAR)』,1905년, J. 마틴 밀러(J. MARTIN MILLER) 저 / 인터넷아카이브



  『전경』에는 동남풍과 관련된 공사가 두 가지 나온다. 하나는 1903년에 서양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동남풍을 일으키시는 공사(예시 24절)이고 다른 하나는 1909년에 동남풍을 일으키며 행하셨던 매화(埋火) 공사(공사 3장 29절)이다. 두 공사에서 동남풍은 49일 동안 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글에서는 두 공사 중에서 서양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일으키셨던 동남풍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상생의 길』 제2호를 보면 이미 이 주제에 대하여 다룬 내용이 있다. 그 글에서는 러일 전쟁의 개별 전투와 국제 관계에서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보이지 않는 힘의 도움이 있었다’라고 결론지으며,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동남풍’을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보이지 않는 힘’은 동남풍을 일으키는 공사를 비롯하여 상제님께서 행하셨던 여러 공사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01 여기서는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동남풍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상제님의 행적을 당시 역사적 배경과 관련하여 이해해 보고 그 바탕 위에서 동남풍의 공사적 의미에 관하여 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 당시 상제님의 행적과 러일협상
  상제님께서 서양 세력을 꺾는 공사를 행하실 때의 전후 행적은 교운 1장 12절~14절, 예시 23절~24절에 잘 나와 있다. 이중 교운 1장의 구절들에는 상제님께서 김병욱을 반역 혐의에서 구제하시는 과정이 나와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의 행적을 엿볼 수 있다. 김병욱은 1903년 4월부터 전라도 남원에서 세금 징수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8월에 이르러 김병욱이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일당이라는 혐의로 체포령이 내려져 포교들이 서울에서 남원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아셨던 상제님께서는 포교들이 도착하기 전날 남원에 내려가 그를 구하여 전주로 데리고 가셨다. 이때 김병욱이 받았던 혐의는, 1900년에 박영효가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고종의 둘째 아들 이강(李堈, 1877~1955)을 추대하려는 쿠데타 계획에 동조하였던 잔당이라는 누명으로 추측된다.02
  전주로 가신 상제님께서는 서천교 네거리에 있던 서원규의 집으로 가셨다. 서원규는 김병욱을 보고 몹시 놀라면서 “그대가 어떻게 사지를 벗어났으며 또 어떻게 하려고 이런 위지에 들어섰느냐. 너무나 급한 화이기에 미처 연락할 새가 없었노라.” 말하며 겨우 한나절 차이로 위기에서 벗어났음을 전하자 김병욱은 상제님을 천신으로 여기며 탄복하였다.03 김병욱이 머물게 된 서원규의 약국은 서천교 네거리의 번화가에 있었다. 김병욱에 대한 수배의 훈령이 내려지고 곳곳에 방이 붙자 그는 근심과 걱정이 많아졌다. 하지만 상제님께서는 근심하지 말라고 이르시며 그를 데리고 거리를 왕래하시면서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기도 하셨다.04 김병욱은 서원규의 집에서는 약 한 달여를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상제님께서는 김병욱을 전주 장흥해의 집으로 데려가서 그곳에서 석 달 동안 머물게 하셨다. 석 달이 지나서 러일 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였고 박영효에 대한 조정의 혐의가 풀리며 김병욱에 대한 수배령도 해제되었다.05 그의 수배령 해제는 일본의 서울 점령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천으로 상륙하여 서울을 점령한 일본은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한 후 대한제국의 정치, 군사, 외교적 자주권을 제약하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양력 1904년 2월 23일)를 강압적으로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발판이었다. 그 영향으로 친일파였던 박영효의 혐의에 대한 수사는 일본의 압박을 받아 더 이상 진행하기 어려워지면서 김병욱의 수배령도 풀린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 상제님의 행적을 시간순으로 정리해 보면, 1903년 8월에 반역 혐의를 받았던 김병욱을 남원에서 데리고 전주 서천교 네거리에 있던 서원규의 약방으로 가셨다. 이곳에 9월 중순 무렵까지 김병욱을 머물게 하신 후 다시 전주 장흥해의 집으로 가셔서 12월 중순쯤까지 그를 머물도록 하셨다. 김병욱이 장흥해의 집에 머문 지 석 달이 지나자 러일 전쟁이 터졌고[1903년 12월 22일(양력 1904년 2월 8일)],06 상제님께서는 그에게 마음을 놓으라고 이르시며 혐의가 풀렸음을 전해주셨다. 이 기간에 상제님의 다른 행적이 『전경』에 나와 있지 않아서 김병욱과 함께 지내셨는지 아니면 다른 곳을 다니셨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이 시기(8월~12월 중순)에 서양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49일을 한 도수07로 하여 동남풍을 일으키며 공사를 행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상제님의 이 공사가 행해지던 시기에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과 러시아의 만주와 대한제국 문제를 둘러싼 협상(러일협상)이었다. 협상 기간은 1903년 6월부터 12월(양력 1903년 7월~1904년 2월)까지였다. 이 협상에서 일본이 주장한 것은 (1) 대한제국에서 일본의 상업ㆍ정치ㆍ군사상의 권리 보장, (2) 일본은 대한제국에 필요한 경우 일정 기간 군대를 파견하고 철수함, (3) 만주에서 러시아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며 필요한 경우 만주에 일정 기간 러시아는 군대를 파견하고 철수함 등의 내용이었다. 반면 러시아의 주장은 (1)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 약속, (2)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상업적 이익과 민정(民政)에 대한 조언의 권리를 러시아가 승인함, (3) 일본군의 대한제국 파견 시 러시아에 통보하고 대한제국 영토의 군사상 목적 사용 금지, (4) 북위 39도 이북의 대한제국 영토의 중립지대 설정, (5) 만주와 그 연안은 일본의 이익 범위에 포함되지 않음 등이었다.08
  정리하면 협상에서 일본이 주장한 요지는 러시아의 만주 지배를 승인하는 대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강점과 정치ㆍ상업적 권리를 승인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러시아는 만주에서 러시아의 군사적 강점과 상업적 권리를 주장하며, 대한제국에서는 일본의 상업적 활동은 인정하지만, 군사적 강점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양국의 주장이 대립하며 타결되지 않자 협상 중지를 선언한 일본은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4일 후에 중국 여순항에 있던 러시아 제국 군함을 기습 공격(양력 1904년 2월 8일)하며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 「여순항의 대해전도」, 러시아 선박을 격침시키는 일본 전함, 1904년, 위키미디어



▲ 「제물포 해전 (THE NAVAL BATTLE AT CHEMULPO)」, 일본군의 기습 포격으로 침몰하는 러시아 순양함,『러·일 전쟁의 긴박한 이야기(THRILLING STORIES RUSSIAN-JAPANES WAR)』,1905년, J. 마틴 밀러(J. MARTIN MILLER) 저 / 인터넷아카이브



2. 공사의 내용
  서양 세력을 물리치는 공사에 관한 내용은 공사 1장 12절~13절, 예시 23절~24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공사 1장 12절~13절을 보면 상제님께서 김병욱과 대화하시며 공사의 방향을 정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상제께서 김 병욱에게 “이제 국세가 날로 기울어 정부는 매사를 외국인에게 의지하게 됨에 따라 당파가 분립하여 주의 주장을 달리하고 또는 일본과 친선을 맺고 또는 노국에 접근하니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느냐”고 물으시니 그가 “인종의 차별과 동서의 구별로 인하여 일본과 친함이 옳을까 하나이다”고 상제께 대답하니 상제께서 “그대의 말이 과연 옳도다” 하시고 서양 세력을 물리치고자 신명 공사를 행하셨도다. (공사 1장 12절)


이제 동양(東洋) 형세가 그 존망의 급박함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있으므로 상제께서 세력이 서양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공사를 행하셨도다. (공사 1장 13절)


  위 구절은,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행하고 있는 동양인에 대한 인종적 차별과 언어, 생활 풍습 등의 차이에서 일어날 동서양 문화의 충돌을 걱정하는 김병욱의 의견을 상제님께서 옳다고 여기시며 동양을 구제하기 위해 서양을 물리치는 공사를 행하셨다는 내용이다. 주목되는 것은 ‘인종의 차별과 동서의 구별’ 문제가 공사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었다는 점이다. 위 문답이 있었던 시기를 추측해보면 우리나라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격하게 대립하며 러일 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1903년의 어느 때로 짐작된다. 이는 『전경』에 나오는 상제님의 행적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1903년 정월에 종도가 된 것으로 알려진 김병욱은 이해 3월에 백남신을 종도로 추천할 때09와 8월에 반역 혐의로 상제님으로부터 구제받았던 일 외에 다른 공사에 참여한 내력이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위 구절의 시기는 상제님께서 김병욱을 구제하셨던 1903년 8월~12월 사이에 있었던 일로 추정된다.


▲ 「행진하는 일본군 (THE JAPANESE ARMY ON THE MARCH)」, 조선의 중앙(서울)로 아무런 저항없이 빠르게 돌진하는 일본포병대,『러·일 전쟁의 긴박한 이야기(THRILLING STORIES RUSSIAN-JAPANES WAR)』,1905년, J. 마틴 밀러(J. MARTIN MILLER) 저 / 인터넷아카이브



  다음으로 예시 23절~24절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구절들에서는 상제님께서 공사를 행하셨던 방식에 관한 구체적 서술이 나와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이제 동양 형세가 위급함이 누란과 같아서 내가 붙잡지 아니하면 영원히 서양에 넘어가리라” 깊이 우려하시사 종도들에게 계묘년 여름에 “내가 일로 전쟁(日露戰爭)을 붙여 일본을 도와서 러시아를 물리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예시 23절)


또 상제께서 “이제 서양 사람의 세력을 물리치고 동양을 붙잡음이 옳으니 대신문(大神門)을 열어 四十九일을 한 도수로 하여 동남풍을 불어 일으켜 서양 세력을 꺾으리라”고 말씀하시고 공사를 행하셨도다. (예시 24절)


  위 내용에는 앞으로 일어날 러일 전쟁에 대한 상제님의 예시와 함께 일본이 러시아를 물리치도록 하실 것이란 말씀이 나와 있다. 이러한 결과를 위해서 ‘대신문(大神門)을 열어 49일을 한 도수로 하여 동남풍을 일으키는’ 공사를 행하셨다는 것이다. 위 구절 중에는 2가지 내용이 눈에 띈다. 하나는 이 공사가 ‘대신문을 열어’ 행해졌다는 점이다.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대신문’은 한자 뜻만으로 생각해 보면, 신명계의 ‘대신명’ 또는 ‘많은 신명’이 공사에 참여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는 아마도 상제님의 공사가 만주와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동서양 세력의 단순한 승패에 관한 결정이 아니라, 동양에서 서양의 침략을 막는 세계사적 전환을 이룩하는 공사였기 때문에 ‘대신명’이나 ‘많은 신명’의 움직임이 필요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점은 예시 23절에서 ‘계묘년 여름’에 이 말씀을 하셨다는 기술에 대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상제님의 행적을 고려하면 ‘계묘년 여름’은 8월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공사는 49일이라는 기간 동안 행해졌기 때문에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예시 23절~24절의 공사의 시기를 ‘계묘년 여름(8월)’으로 한정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예시 23절~24절을 맥락적으로 이해해 보면 상제님께서 8월에 공사의 뜻을 말씀하시고 8월~12월 중순의 어느 시기에 공사를 행하셨던 일을 개괄적으로 기술한 구절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 공사에 김병욱이 직접 참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제님께서 위 말씀을 하셨던 장소는 김병욱과 함께 전주에 계실 때 종도들 앞에서 하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3. 동남풍의 의미
  상제님께서는 서양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49일을 한 도수’로 동남풍을 불게 하셨는데 동남풍이 러일 전쟁과 어떤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까? 동남풍과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전쟁은 후한(後漢) 말에 있었던 적벽대전(208년)이다. 소설 『삼국지』의 배경이기도 한 이 전쟁에서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동남풍을 이용하여 조조(曹操, 155~220)의 군대를 화공(火攻)으로 격파한다. 그리고 패배한 조조가 화용도(華容道)로 후퇴할 것을 알았던 제갈량은 관우(關羽, ?~219)에게 이곳을 지키게 하였는데, 그의 지략에 대하여 상제님께서는 “제갈량의 재조는 조조로 하여금 화용도에서 만나게 하는 데 있느니라.”(교법 3장 28절)라고 평하기도 하셨다.
  적벽대전에서 동남풍은 화공 전술의 성공을 가르는 핵심 요소였으며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바람은 천지의 조화로 일어난다. 그렇다면 러일 전쟁에서도 적벽대전처럼 동남풍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까? 러일 전쟁의 여러 전투를 살펴보면 바람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짐작되는 개별 전투의 사례들은 있지만 동남풍의 영향으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전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의 발발10을 알렸던 여순항 해전(양력 1904년 2월 8일)이나 첫 육상전이었던 압록강 전투(양력 1904년 5월 1일), 만주에서 전개되었던 봉천 전투11(양력 1905년 2월~3월) 등 일본이 모두 승리를 거둔 이들 전투에서 바람이 일본군에게 유리한 전투 요인으로 작용한 점이 발견된다. 하지만 이 전투들은 양 진영 간의 소모전이었을 뿐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전투는 아니었다. 러일 전쟁에서 전쟁에 향배를 가른 전투는 쓰시마 해전(양력 1905년 5월)으로 알려져 있다.


▲ 「피의 강 (A RIVER OF BLOOD)」, 압록강 위주 지역 전투,『러·일 전쟁의 긴박한 이야기(THRILLING STORIES RUSSIAN-JAPANES WAR)』,1905년, J. 마틴 밀러(J. MARTIN MILLER) 저 / 인터넷아카이브



▲ 「봉천 전투(Battle of Mukden)」, 1905년, 프리츠 노이만, 러시아, 위키미디어



  당시 러시아 함대는 쓰시마섬 남서쪽에서 대한해협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항해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 해군은 그 항로를 미리 탐지하고 러시아 함대를 차단하기 위해 쓰시마섬 북동쪽에 봉쇄망을 구축한 후 함포 교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12 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승리하는 데 바람이라는 기후적 요소는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바람이 많이 불어 바다의 파고가 높았던 기상 조건에서 무게 중심이 낮은 함정을 갖춘 일본 해군은 무게 중심이 높아 선체가 많이 흔들리는 러시아 함대보다 함포의 표적 탐지가 쉬웠다. 그리고 해전의 승패는 일본 해군이 러시아군을 먼저 정탐하여 항로를 차단하고 일제 사격에 유리한 공격 진형을 먼저 구축함으로써 결정되었다. 사실 현대전에서는 동남풍과 같은 바람의 영향보다는 전함의 무기 체계와 우수한 함포 장비 등 신식 무기의 성능이 승패에 더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러일 전쟁과 동남풍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이에 관한 실마리는 “동남풍을 불어 일으켜 서양 세력을 꺾으리라”라는 상제님의 말씀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말씀은 서양 세력으로 상징되는 러시아를 꺾기 위해 동남풍을 일으켜 일본이 승리하도록 하시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공사를 통해 상제님께서는 공사와 관련된 세 나라인 조선-일본-러시아의 역학 관계를 변경할 거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동남풍이라는 자연 현상으로 전쟁 승패가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볼 때 동남풍에는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남풍은 바람과 함께 방위와도 관계가 있다. 여기서 공사와 관련된 세 나라의 지리적 위치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한제국[조선]의 황제가 있는 한성[서울]을 기준으로 할 때 일황이 있던 일본의 수도 도쿄는 동남쪽 위치에 있다. 반면에 러시아 황제가 있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서북쪽 위치에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를 전제로 하여 동남풍의 공사적 의미를 이해해 보면, 동남쪽에 있는 일본에 기운을 붙여서 서양 세력인 러시아를 꺾어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공사로 풀이된다.
  전쟁은 국가의 명운이 걸린 총력전이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유리한 대외적 외교관계를 구축하고 대내적 단합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이를 일본은 성공하였고 러시아는 실패하였다. 일본이 외국(런던, 뉴욕)에서 국채를 발행하는 데 성공하여 전쟁 비용을 마련하고 계획에 따라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러시아는 독일과 대립하고 있던 서부전선에 묶여 있는 병력을 만주로 이동시켜 일본과의 단일 전선을 구축하는 데 실패하였다. 또한 러시아는 1905년 1월부터 전쟁 반대와 생존권을 요구하는 혁명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며 내부 단합에 실패하였다. 군사 전략의 측면에서도 러시아는 우세한 육상 전력을 갖추고도 일본의 공격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며 패배하여 만주에서 후퇴하였고, 쓰시마 해전에서의 패배로 제해권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러일 전쟁과 관련된 요인들은 단순히 전투 상황에 그치지 않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외교 문제와 함께 전략 전술 그리고 즉각적으로 필요한 병력 투입 등 복합적 요소들의 결합이었다. 당시 세계인들은 모두 러일 전쟁을 소인과 거인의 싸움으로 묘사하며 러시아의 승리로 결정 날 것이라 예상하였다. 하지만 상제님의 공사로 그 결과가 역전되었으며 공사 기간이 49일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던 점도 전쟁의 복잡성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러시아 재난」. 쓰시마 해전 프랑스신문 삽화, 출처: 주르날 제국주의



  1907년 순창 농암에 계실 때 상제님께서는 이 공사에 담겨 있는 또 다른 의미를 말씀하셨다. “조선을 서양으로 넘기면 인종의 차별로 학대가 심하여 살아날 수가 없고 청국으로 넘겨도 그 민족이 우둔하여 뒷감당을 못 할 것이라. 일본은 임진란 이후 도술신명 사이에 척이 맺혀 있으니 그들에게 맡겨 주어야 척이 풀릴지라. 그러므로 그들에게 일시 천하 통일지기(一時天下統一之氣)와 일월 대명지기(日月大明之氣)를 붙여 주어서 역사케 하고자 하나 한 가지 못 줄 것이 있으니 곧 인(仁)이니라.”(공사 2장 4절) 이 구절에서 상제님께서는 서양 세력을 물리치실 때 일본에 ‘일시 천하 통일지기와 일월 대명지기’를 붙이셨다고 밝히시며 이는 임진란 이후 도술신명 사이의 척을 풀기 위함이라 하셨다. 이는 동남풍을 일으켜 서양 세력을 물리치는 공사가 일본에 기운을 붙이는 것과 함께 조선-일본 사이의 척을 푸는 것과도 연관이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말씀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4. 동남풍 공사에 대한 이해
  위 공사가 있었던 20세기 초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전쟁을 통해 식민지 확보 경쟁을 벌이던 약육강식의 국제질서가 지배하던 때였다. 침략하는 제국주의 국가에 대항하여 극소수 약소국만이 살아남았고 대부분은 힘이 없어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었다. 힘이 없던 대한제국도 처지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대한제국은 러일 전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전쟁 직전인 1903년 12월(양력 1904년 1월)에 전시중립을 선언13하였지만,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인천에 상륙한 후 서울을 점령하였다. 인천과 마산포, 원산 등에 일본군이 상륙한 행위는 주권국가인 대한제국의 승인을 받지 않은 침략행위였다. 그러나 이후 일본은 강권으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일본의 침략행위를 합법적 행위로 정당화함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자유로운 군사 활동을 대한제국의 승인 아래 이루어지는 것으로 만들었다.14 러일 전쟁을 계기로 대한제국은 일본군의 자유로운 작전 지역으로 전락하여15 일본의 실질적인 반식민지나 마찬가지인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러일 전쟁의 승패에 따라 어느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가 되느냐는 문제만 남아있었을 뿐 식민지의 길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당시 상제님께서 우리 민족의 활로를 열기 위해 ‘서양 세력을 물리치는 공사’를 행하셨다. 이 일은 상제님께서 우리나라의 국운과 관련하여 행하셨던 공사의 시작이었다. 이 공사 이후에도 상제님께서는 여러 공사를 행하셨다. 공사 1장 24절(1906년 윤달 4월)에서는 “때는 실로 흥망의 기로이라 의병을 거두고 민족의 활로를 열었느니라.”라고 하시며 최익현이 일으킨 을사의병에 참전한 많은 사람의 희생을 걱정하시며 이를 막는 공사를 행하셨다. 공사 2장 3절(1907년 10월)에서는 “회문산(回文山)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에 붙여 조선 국운을 돌리려 함이라.” 하시며 조선의 국운을 위한 공사를 보셨다. 또한 예시 29절(1909년 추정)에서는 “우리나라를 상등국으로 만들기 위해 서양 신명을 불러와야 할지니…”라고 하시며 공사를 행하기도 하셨다.


▲ 여주본부도장 숭도문 <오선위기> 벽화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던 이 공사들의 흐름을 보면 종착지는 조선을 상등국으로 만드는 데 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조선의 국운을 열기 위해 여러 공사를 행하셨던 상제님께서는 그 시작으로 ‘서양 세력을 물리치는 공사’를 행하여 거대하게 밀려들어 오는 서양 제국주의의 격류를 되돌리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당시 식민지가 될 처지에 있었던 대한제국의 현실적 상황을 기본 상수로 놓고 생각해 보면, ‘서양 세력을 물리치는 공사’는 우리 민족의 활로를 여는 순차적 과정의 한 단계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01 『상생의 길』, 제2호, 「‘언덕위의 구름’을 읽고, 예시 23절과 관련하여」 (경기: 대순진리회 출판부, 2004), pp.96-125 참조.
02 이 사건은 1900년 11월에 발각되었고 친일파였던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정부는 궐석재판을 거쳐 박영효를 교수형으로 단죄하였으나 주동자였던 그를 체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잔당에 대한 수사는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난 후 고종황제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박영효 등에 대하여 일본 정부의 추방을 요청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박영효는 1907년 부산에 밀입국한 후 고종황제의 특별사면을 받아 정식으로 귀국하였다.
03 교운 1장 12절 참조.
04 교운 1장 13절 참조.
05 교운 1장 14절 참조.
06 일본은 중국 요동반도 여순항에 있던 러시아 극동 함대에 대한 선제공격(12월 22일)을 감행한 후 12월 24일(양력 2월 10일) 러시아에 선전 포고하였다.
07 공사 3장 29절에는 ‘49일 한 도수’의 기간을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 “상제께서 기유(己酉)년에 들어서 매화(埋火) 공사를 행하시고 四十九일간 동남풍을 불게 하실 때 四十八일 되는 날 어느 사람이 찾아와서 병을 치료하여 주실 것을 애원하기에 상제께서 공사에 전념하시는 중이므로 응하지 아니하였더니…”
0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2, 「대한제국」 (경기: 탐구당문화사, 1999), pp.193-197 참조.
09 행록 2장 20절 참조.
10 러·일 전쟁의 개전 초기 러시아군은 110만 명의 정규군과 350만 명의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병력의 대부분은 서부전선(독일 및 오스트리아 국경)에 배치되어 개전 직전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는 육군 9만 8천 명, 해군 군함 110척(배수량 합계 59만 톤)이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육군 18만 명과 예비군 67만 명, 해군 군함 152척(배수량 합계 19만 3천 톤)의 병력을 갖추고 있었다. 박영준,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서울: 사회평론아카데미, 2020), p.155 참조. 러·일 전쟁 기간 러시아군은 약 13만 5천 명이 전사하였고 일본군은 약 9만 명이 전사하였다.
11 가장 치열했던 육상 대회전이었던 봉천(선양) 전투는 1905년 2월 20일~3월 10일(양력)까지 약 20일간의 격전이었다. 러시아군 36만 명과 일본군 24만 명이 동원되어 투입되었고, 러시아군이 오랜 격전으로 군수품(탄약, 식량 등) 보급에 문제가 생기자(시베리아횡단철도가 완비되지 않아 보급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못함) 퇴각하면서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전사자 8,700여 명과 부상 및 실종자 8만여 명의 피해를 보았고, 일본군은 전사자 1만 6천 명과 부상자 약 6만 명이 사상하는 피해를 보았다.
12 제2태평양함대라 명명된 러시아 함대는 1904년 10월 15일(양력)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해군기지에서 출발하여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7개월이 넘는 항해 끝에 대한해협 인근에 도착하였다. 1905년 5월 27일(양력) 대한해협을 통과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서 이동하던 중에 일본 해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14,000여 명의 승무원 중 5천여 명이 전사하고 6천여 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총 41척의 함대 선단 중 3척만이 일본 해군의 포위망을 뚫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할 수 있었다.
13 대한제국의 중립화 논의는 고종황제에 의해 최초로 제기되었다. 고종황제는 1900년 8월 일본으로 향하는 조병식(趙秉式)을 통해 일본에 대한제국의 중립화를 요청했으나, 일본 측의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1901년 1월 대한제국의 중립화 논의를 러시아가 일본에 제안하였으나 거부되었다. 러시아의 전략은 대한제국을 점령하기 전에 중립국으로 만들어 놓고 만주를 먼저 완전히 점령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어 놓고 일본을 압박하면, 대한제국에 대한 그들의 군사적 점령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란 의도였다. 하지만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군사적 강점을 문제로 삼아 러시아에 대응하며 대한제국에 대한 배타적 지배를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대립하였다. 러·일협상 과정은 러-일 사이의 충돌을 잘 보여주며 이에 따라 중립화 논의는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홍순호, 『한국국제관계사이론』 (서울: 대왕사, 1993), p.360; 김종헌, 「1900년 이후 러·일간의 한반도 중립화 및 분할논의: 서울주차 러시아공사 빠블로프의 역할을 중심으로」, 『한국동북아논총』 제14권 (2009), pp.32-45 참조. 이런 정세에서 고종황제가 러·일 전쟁 발발 직전 다시 제기한 것이 ‘전시중립 선언’이었다.
14 「한일의정서」,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정부는 속히 임기 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하며,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할 수 있을 것.”
15 러·일 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군수물자 수송을 목적으로 철도 부설을 추진하여 1904년 12월에 경부선 철도를 개통하였고 1905년 11월에 경의선 철도를 개통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철도노선 상에 있는 토지에 대한 강제수용과 가옥 파괴를 자행하였으며, 친일 단체였던 일진회(一進會)를 조종하여 철도 부설에 필요한 강제노역 인원을 확보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하도록 하였다.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