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28년(1998) 6월

이전호 다음호

 

회보 1면 대순지침 상제님의 일대기 대순논단 28수 신명의 생애 24절후 신명의 생애 수기 금강산 이야기 종단소식 대순칼럼 도인 신선 이야기 청계탑 고사 한마디 전경속 역사인물 알립니다

24절후 신명의 생애 : 진숙보(秦叔寶)

大雪절후 관장하는

 

진숙보(秦叔寶)

 

           

            

  진경(秦瓊)은 자(字)가 숙보(叔寶)인데 이 자(字)로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제주(濟州) 역성(歷城) 사람이다. 처음에 수(隋)의 장수 내호아(來護兒)의 군부에 있었는데, 숙보(叔寶)가 모친상을 당함에 호아(護兒)가 관리를 보내 문상(問喪)하였다. 이를 이상히 여긴 관리가 묻기를 『일개 병사의 죽음이나 상사(喪事)에는 장군께서 이제껏 조문하신 적이 없으셨는데, 이제 유독 숙보에게만 문상을 하시니 어인 까닭입니까?』 호아가 답하기를 『이 사람은 재치 있고 용감하며 절개가 곧으니 어찌 비천한 자리에 오래 머물겠는가?』
  곧 이어 통수(通守) 장수 타를 좇아 노명월(盧明月)을 하패에서 공략하는데, 적의 병사는 십여 만이요 수타(須陀)가 거느리는 병사는 겨우 적군의 십분의 일 밖에 되지 않았고, 성벽이 견고하여 진군(進軍)하지도 못한 채 식량이 떨어지니 수타는 병사들을 이끌고 물러서려 하였다. 수타가 말하기를『우리들이 후퇴하는 것을 적들이 보면 반드시 전군(全軍)이 추격해 올 것이다. 정예부대를 뽑아 적군의 진영을 습격하면 상황이 좀 나아질 것이니 누가 나서겠는가?』 병사들 중에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숙보와 나사신(羅士信) 만이 용감히 나섰다. 날랜 병사 천 명을 나누어 풀 더미 사이에 매복 시키고 수타는 진영을 버리고 도망가는 척 했다. 그러자 명월(明月)이 전 군사를 동원해 추격해 왔다. 숙보 등은 말을 몰고 가 적의 진영 앞에서 문을 두드렸는데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갈 수가 없자, 누대에 올라가 적의 깃발을 뽑고 수십 명을 죽인 후, 진영이 어지러워진 틈을 타 성문을 지키는 병사를 죽이고 불을 질러 30여 곳을 태웠다. 명월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되돌아오는데 수타가 뒤에서 반격하여 적군을 대파했다.
  수타를 좇아 이밀과 형양(滎陽)에서 싸웠다. 수타가 죽자 남은 병사를 거느리고 배인기(裵仁基)에게 의탁하였다. 인기(仁基)가 이밀에게 항복하자 이밀은 숙보를 얻게 되니, 크게 기뻐하며 그를 군부중의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삼아 후대하였다. 이밀이 우문화급(宇文化及)과 여양(黎陽)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고 말에서 떨어져 거의 죽을 뻔하였고, 게다가 적병이 추격해 왔는데, 오직 숙보만이 그를 호위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고조가 숙보로 하여금 진왕의 막부에서 진왕을 섬기도록 하였는데, 진왕이 더욱 그를 총애하였다. 왕을 좇아 장춘궁(長春宮)을 평정하여 마군총관(馬軍總管)을 격파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으므로 황제가 상으로 황금병을 하사하고, 공로를 치하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처자도 돌보지 아니하고 짐에게 와 주었고 또한 공로도 세웠으니, 만약 짐의 살코기가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베어서 그대에게 줄 것이어 늘, 하물며 짐의 자녀나 구슬, 비단 등이랴.』 얼마 후에 진왕의 우삼통군(右三統軍) 직책을 배수 받고, 송금강(宋金剛)을 개휴(介休)에서 몰아내어 상주국(上柱國)을 배수 받았다. 왕을 좇아 세충, 건덕, 흑달 세 도적을 토벌하는데 그 자신이 매번 선봉에 서니 감히 굳세게 대항하는 적들이 없었다. 금과 비단으로 하사 받은 것이 그때까지 수천 수만에 이르렀고, 나아가 익국공(翼國公)으로 승진했다. 매번 적군중의 뛰어난 장사나 날쌘 병사가 진영을 오락가락하며 힘을 과시할 때마다 진왕은 숙보로 하여금 그들을 잡아오라고 명했고, 그러면 숙보는 말을 달려 창을 세우고 수많은 적군 사이에서 그들을 찌름에 숙보의 뜻대로 되지 않음이 없었고 이로써 그는 상당히 자부했다. 은태자와 소왕(巢王)을 진압함에 이르러 그 공으로써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을 배수 받았으며 실제 식읍이 칠백 호에 달하였다.
  훗날 병이 들어 차츰 병세가 악화되었는데,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나는 어려서부터 전쟁터에서 자라나서 200여 차례의 전투를 겪으면서 여러 번 중상을 입어 피 흘리고 고꾸라졌었으니 어찌 병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죽어서 서주도독(徐州都督)에 봉해졌고 소릉(昭陵)에 안장되었다. 태종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돌에다가 그 사람과 말의 모습을 조각하여 묘 앞에 세워서 전공(戰功)을 기념토록 하였다. 정관(貞觀) 13년에 호국공(胡國公)으로 다시 봉해졌다.
  4년 후에 황제가 명령을 내려 사도(司徒)인 조국공(趙國公) 무기(无忌), 사공(司空)인 하간왕(河間王) 효공(孝恭), 사공인 내국공( 國公) 여회(如晦), 사공이면서 태자태사(太子太師)인 정국공(鄭國公) 위징(魏徵), 사공인 양국공(梁國公) 현령(玄齡),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인 악국공(鄂國公) 경덕(敬德), 특진(特進)인 위국공(衛國公) 이정(李靖), 특진(特進)인 송국공(宋國公) 소우(蕭瑀),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인 포국공(褒國公) 지현(志玄), 보국대장군인 기국공(夔國公) 홍기(弘基),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인 장국공(蔣國公) 굴돌통(屈突通), 섬동도행대우복야(陝東道行臺右僕射)인 운국공(隕國公) 개산(開山), 형주도독(荊州都督) 인 초국공(초國公) 순덕(順德), 낙주도독(洛州都督) 인 운국공(隕國公) 량(亮), 이부상서(吏部尙書)인 진국공(陣國公) 군집(君集), 좌요위대장군(左僚衛大將軍)인 담국공 공근(公謹), 좌령군대장군(左領軍大將軍)인 노국공 지절(知節), 예부상서(禮部尙書)인 영흥군공(永興郡公) 세남(世南), 호부상서(戶部尙書)인 유국공 정회(政會), 후부상서인 거국공 당검(唐檢), 병부상서(兵部尙書)인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과 아울러 숙보(叔寶)까지 능연각(凌煙閣)에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였다.
  고종(高宗) 영휘(永徽) 6년에 사신을 보내어 능연각에 그려진 명신(名臣)들의 초상화 중에 제사를 지내도록 한 인물이 일곱이었는데, 위징, 고사렴, 소우, 단지현, 유홍기, 우세남, 진숙보 등의 일곱 명으로 이들은 시종 이름을 날린 자들이었다.

 

<끝>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