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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8년(1998)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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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풍이(馮異) 神明열전

풍이(馮異) 神明열전

         

           

  풍이가 말하였다.

  『저 한 사람의 힘은 강약(强弱)을 따질 수가 없습니다. 노모께서 성중에 계시니 원컨대 돌아가 5개 성에 근거하여 공을 세우고 은덕에 보답하겠나이다.』

광무제는『좋다.』고 대답하였다.

  풍이는 돌아가 묘맹에게 말하였다.

  『지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강성하여 일어났으나 횡포한 자들이 많은데 오직 유장군(劉將軍) 만이 이르는 곳에서 노략질을 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을 보면 보통 사람이 아니니 그에게 귀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묘맹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생사의 운명을 함께 하기로 하였으니 삼가 그대의 계책을 따르겠소.』
  광무제가 남쪽으로 완(宛) 땅에 돌아왔는데 갱시제(更始帝)의 여러 장군들 중 부서현을 공략한 자가 전후 10여명에 이르렀으나 풍이는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광무제가 사예교위(司隸校尉)가 되어 부성현을 지나가는 길에 풍이 등은 즉시 성문을 열고 술과 소고기를 바치면서 그를 맞아들였다. 이에 광무제는 풍이를 주부(主簿)로 삼았다. 풍이가 광무제에게 같은 고을 사람인 요기(銚期)·숙수(叔壽)·단건(段建)·좌륭(左隆) 등을 천거하자 광무제는 그들을 모두 연사(掾史)로 삼아 그들을 데리고 낙양(洛陽)에 이르렀다.
  갱시제가 여러 차례 광무제를 파견해서 하북을 순행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여러 장군들은 모두 안 된다고 하였다. 이 때 좌승상(左丞相) 조경(曹竟)의 아들 조후(曹詡)가 상서(尙書)를 지내고 있었는데 두 부자가 요직에 있었으므로 풍이는 광무제에게 그들과 두텁게 결탁하라고 권유하였다. 그 후 광무제가 하북을 지날 때 조후는 힘이 되어 주었다.
  백승(伯升)이 패한 이후 광무제는 감히 슬퍼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못하고 매번 홀로 있음으로 때마다 술과 고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잠자리에는 눈물을 흘린 자국이 있었다. 풍이가 홀로 머리를 조아리며 넌지시 슬퍼하는 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광무제가 그를 만류하면서 말하였다.

  『 경은 망언(妄言)하지 않도록 하시오.』
  풍이가 다시 한가한 틈을 타서 광무제에게 진언(進言)하였다.

  『천하가 모두 왕씨(王氏)를 고통스럽게 여겨 한(漢)나라를 사모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갱시제의 여러 장군들은 제멋대로이고 포학하며 이르는 곳마다 노략질을 하여 백성들이 실망하여 의지할 곳을 잃고 있습니다. 지금 공께서는 오로지 천명에 따라 은덕(恩德)을 베풀고 계십니다. 걸주(桀紂)의 어지러움이 있고 난 후에 탕무(湯武)의 공훈이 있었으며 사람이 오래도록 굶주리고 목마르게 되면 쉽게 포만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당장 관속들을 나누어 파견하여 여러 현들을 순행하면서 원한과 응어리 맺힌 것을 다스리게 하시어 은택을 베푸소서.』
  광무제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한단(邯鄲)에 이르러 풍이와 요기를 파견해서 수레를 타고 여러 속현(屬縣)들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죄인을 심문하였으며,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목숨 걸고 스스로 왕께 나아가려는 사람은 그 죄를 사하여 주고, 이천석 이상 되는 장리(長吏) 가운데 광무제에게 동화하는 자와 복종하지 않는 자의 명단을 분류 작성하여 바치게 하였다.
  왕랑(王郞)의 병사가 일어나자, 광무제는 계(薊)로부터 동남쪽으로 달리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면서 풀밭에서 자고 요양현(饒陽縣) 무루정(無蔞亭)에 이르렀다. 그때의 날씨는 매우 추워서 병사들이 모두 굶주리고 피곤해 있었다.

  풍이는 콩죽을 바쳐 광무제가 요기하도록 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 광무제는 여러 장군들에게 말하였다. 

  『어제 공손(公孫:풍이의 字)이 바친 콩죽 덕분에 추위와 굶주림이 모두 풀렸다.』
  남궁현(南宮縣)에 이르렀을 때 큰 비바람을 만났다. 광무제는 수레를 끌고 길옆 빈집으로 들어갔다. 풍이는 땔나무를 해오고 등우(鄧禹)가 불을 지펴서 광무제는 부뚜막에 대고 옷을 말렸다. 풍이는 다시 보리밥과 토끼의 어깨고기를 왕에게 바쳐 요기 하도록 하였다.

  또한 호타하(虖沱河)를 건너 신도(信都)에 이르렀을 때 풍이로 하여금 따로 하간(河間)의 병사를 모으게 하였다. 풍이는 돌아와 편장군(偏將軍)을 배수받고 왕을 따라 왕망을 깨뜨리고 나서 응후(應侯)로 봉해졌다.
  풍이는 사람됨이 겸손하여 오만하지 않았다. 길을 가다 다른 장수들을 만나면 늘 수레를 한쪽으로 끌어 길을 비켜주었다. 나아가고 물러섬에 항상 규율이 있어서 군중(軍中)에서는 그에게 단정하다고 칭찬하였다.

  매년 머물러 쉴 때 여러 장군들이 함께 앉아 공(功)을 논하는데 풍이는 항상 홀로 나무 아래 앉았으므로 군대에서는 그를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고 불렀다. 한단(邯鄲)을 깨뜨리고 나서 부서를 바꾸고 여러 장군들에게 나누어주며 각기 배속된 병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그러나 병사들이 모두 말하길 대수장군에게 속하고 싶다고 하여 광무제는 그 때문에 풍이를 중히 여겼다. 풍이는 또한 철경(鐵脛)을 북평(北平)에서 격파하고 흉노(匈奴)의 우림답돈왕(于林闒頓王)을 항복시키고 나서 왕을 따라 하북(河北)을 평정하였다.
  그 때 갱시제는 무음왕(舞陰王) 이질(李軼)·늠구왕(廩丘王)·전립(田立)·대사마(大司馬)·주유(朱鮪)·백호공(白虎公)·진교(陳僑)로 하여금 30만에 달하는 병사를 이끌고 하남(河南) 태수인 무발(武勃)과 함께 낙양(洛陽)을 지키게 하였다. 광무제는 장차 북쪽으로 연(燕)·조(趙)를 순행하려고 하여 위군(魏郡)·하내(河內)군 만이 군대를 만나지 않았으며 성읍(城邑)이 완정(完整)하고 창고가 가득하여 구순을 하내(河內) 태수로 배수하고 풍이는 맹진장군(孟津將軍)으로 삼아 2개 군의 군대를 거느리고 하수(河水)로 올라와 구순과 합세하여 주유(朱鮪)와 대항하게 하였다.
  풍이는 이질에게 보내는 서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듣건데 밝은 거울로 모습을 비추고 지나간 일로 지금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옛날 미자(微子)는 은(殷) 나라를 떠나 주(周) 나라로 들어갔으며 항백(項伯)은 초(楚) 나라를 배반하고 한(漢) 나라에 귀의하였고, 주발(周勃)은 대왕(代王)을 맞아들이고 소제(小帝)를 내쳤으며 곽광(藿光)은 효선(孝宣)을 받들고 창읍(昌邑)을 폐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늘을 두려워하고 명(命)을 알았으며 존망(存亡)의 기미를 보고 폐하고 흥하는 일을 살펴서 그런 까닭에 한 때에 성공하고 만세에 위업을 드리울 수 있었습니다. 설사 장안(長安)이 아직도 도울만하다고 하여도 세월이 흘러가면 왕과의 관계가 소원해져서 가까워지기 힘드니 그렇게 되면 그대가 어떻게 한 모퉁이를 점거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장안이 어지러이 무너지고 적미(赤眉)족이 접근해오며 왕후(王侯)들이 난을 일으키고 대신들이 괴리되며 기강(紀綱)이 끊어지고 사방이 붕괴되며 다른 성을 가진 종족들이 다투어 일어나고 있으므로 그런 까닭에 소왕(蕭王)께서 눈서리를 맞으면서 하북(河北)을 다스리고 계신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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