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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성구 : 정월 7일, 사람날

정월 7일, 사람날



교무부 한수진




류 서구(柳瑞九)는 상제의 부친과 친분이 있는 분으로서 상제의 예지(豫知)에 크게 놀라 상제를 경송하게 되었도다. 상제께서 그의 내왕을 언제나 미리 아시고 주효를 준비한 사실을 부친이 서구에게 알렸으되 그가 믿지 않았도다. 임인년 정월 七일에 상제께서 그가 다시 오는 것을 마당에서 맞으면서 “세전에 공사가 있어 오신 것을 대접하지 못하여 부친에 대한 예가 안 되었나이다”고 말씀하시고 아우 영학으로 하여금 책력의 틈에 끼워 둔 종이 쪽지를 가져오게 하여 펼쳐 보이시니 “인일에 인간방에서 사람이 오는데 마당에서 만나게 되니 그는 꼭 류 서구였도다(寅日人來寅艮方 逢場必是柳瑞九)”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도다. 이에 류 서구는 놀라 그 후 상제를 경송하게 된 것이니라. (권지 1장 1절)



  상제님께서 펼쳐 보이신 종이쪽지에는 언제, 어느 쪽에서 누가 올지 예견하신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인일(寅日)은 류서구의 방문 날짜를, 인간방(寅艮方)은 그가 찾아오는 방향을 뜻한다. 여기에 적어두신 날짜가 옛 풍습과 관련 있는 듯하다. 당시 풍습에 따르면 류서구가 방문한 정월 7일은 ‘사람의 건강과 안녕을 기리는 날’이라 하여 인일(人日), 인날, 사람날이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진 풍습이다 보니 현대의 우리에게 낯선 날이 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옛 풍습인 사람날을 통해 상제님께서 적어두신 글귀를 이해해 보고자 한다. 

  인일(人日)은 음력 1월 1일 원단(元旦), 음력 1월 15일 대보름처럼 날짜가 정해진 기념일이었다. 풍습의 유래는 중국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음력 1월 7일을 사람날로 정한 이유는 민간설화와 관련이 있다. 여와(女媧)가 세상 만물을 창조할 때 1일에 닭, 2일에 개, 3일에 양, 4일에 돼지, 5일에 소, 6일에 말, 7일에 사람, 8일에 곡식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설화에서 비롯하여 사람날 풍습이 생겼고, 정월 7일은 한 해 동안 사람에게 복이 깃들기를 기원하고 평안을 바라는 날이 되었다.01 

  서한(西漢) 시대 동방삭(東方朔, 기원전 154~93)의 『점서(占書)』에 고대인들이 여와가 만물을 창조한 8일에 맞춰 그해 운을 살폈다는 내용이 나온다. 각각의 짐승날에 날씨를 살펴서 맑으면 잘 자라고, 흐리면 제대로 못 자란다고 생각했다. 사람날에도 날씨에 따라 길흉화복을 점쳤다. 닭, 개, 양 등 해당하는 날짜의 짐승을 도살하지 않았고, 사람날에는 범죄자를 형벌하지 않았다.02 양(梁)나라 종름(宗懍, 500~563 추정)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서도 “정월 초이렛날을 인일(人日)이라 하였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사람날이 되면 한 해 동안 건강하기를 바라며 7가지 나물로 국을 끓여 먹었다. 비단실이나 금박으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병풍에 붙이거나 머리에 꽂았으며,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지었다.03 




  사람날 풍습이 우리나라에 넘어온 시기는 고려 시대로 추정되며,04 이때 행하던 의례가 조선으로 이어졌다. 정월 7일이 되면 신하들이 임금에게 인일 하례(人日賀禮)를 올렸고, 임금은 인승녹패(人勝祿牌: 인일에 하사하는 녹봉 지급 문서)를 내려 주었다.05 조선 후기 학자 홍석모(洪錫謨, 1781~1857)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통해 인일에 동인승(銅人勝: 구리로 만든 작고 둥근 거울 모양의 머리 장식)을 신하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수(隋)나라 유진(劉臻)의 아내 진 씨(陳氏)가 인일에 동인승을 올린 행위를 모방한 것이라고 밝혀두었다.

  국가 의례 외에도 성균관 유생들의 학업을 권장하기 위해 인일제(人日製)라는 특별 과거 시험을 시행했다. 성균관 유생만 응시할 자격이 있었지만, 국왕의 특명이 있을 때는 지방 유생들에게도 응시할 기회가 주어졌다.06 인일이 되면 선비들은 시를 지었다. 조선왕조실록에 홍문관과 병조ㆍ도총부의 입직(入直) 당상관을 승정원에 모아서 음식을 대접하고, 각각 인일(人日)의 율시를 짓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07 이외에 김시습, 허균 등이 풍년과 길흉을 점쳐보는 날씨점을, 김종직, 최립 등이 인일에 쓰는 머리 장식인 인승(人勝)을 소재로 삼아 시를 썼다. 이황, 류성룡 등은 사람날을 맞이하여 지난 일을 돌이켜 본 감상(感想)을 시로 남겼다.08

  사람날을 기리는 풍습은 민간에서도 행해졌다. 사람날에는 하루 동안 잘 쉬어줘야 일 년 내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일하지 않았다. 여성의 외출을 삼가도록 했고, 나머지 식구도 되도록 집 안에 머물렀다. 경북에서는 장수를 기원하며 음식을 볶아 먹거나 7가지 곡식을 혼합하여 인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충북에서는 남녀를 막론하고 남의 집에 가서 잠을 자지 않았다. 부득이 손님이 와서 묵게 될 때는 주인과 손님이 머리 방향을 반대로 두고 자야 액운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전북에서는 칼질 같은 것을 하면 손을 벤다고 해서 칼을 만지지 않았다.09 

  사람날 풍습은 제주도까지 전해진 흔적이 보이는데, 민간에 정착하는 과정에 기존의 풍습과 뒤섞이는 현상도 나타났다. 당시 조선에는 전국적으로 정초십이지일(正初十二支日) 풍습이 자리잡혀 있었다. 정초십이지일은 음력 1월 1일부터 12일까지를 일컫는 것으로, 십이지에 빗대었기 때문에 ‘짐승날’이라고도 불렀다. 그해 처음 맞이하는 동물의 날은 상자일(上子日), 상축일(上丑日) 식으로 해당하는 동물 앞에 상(上) 자를 붙였다.10 

  우리 조상들은 해당 날짜의 동물 외형이나 행동 등에 빗대어 의미를 부여하였고, 거기에 맞춰 행사를 치르거나 금기를 정하였다. 십이지일을 용, 뱀처럼 털이 없는 동물의 날인 무모일(無毛日)과 쥐, 소, 호랑이처럼 털이 있는 동물의 날인 유모일(有毛日)로 구분하여 한해 운을 점치기도 했다. 무모일은 흉한 날, 유모일은 길한 날로 쳤기 때문에 설날이 유모일이면 짐승의 터럭이 자라나듯 풍년이 들 것으로 판단했다.11  




  상묘일(上卯日)에 뽑은 무명실을 토끼실이라 부르며 부적 삼아 몸에 찼고, 상진일(上辰日)이 되면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를 열거나 비가 얼마나 올지 점쳤으며, 뱀이 집안에 들어올 것을 우려해서 상사일(上巳日)에는 머리를 빗지 않는 등 각 동물의 날마다 여러 관습이 있었다.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고, 상서롭게 여겨지는 동물 날에는 다양한 행사를 열거나 해당 동물을 잘 먹인 후에 푹 쉬게 했다. 반면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불길하다고 여겨지는 동물 날에는 주로 금기를 지켰다.12

  곡식을 축내는 쥐나 사람을 해치는 뱀이 집안에 못 들어오게 막았던 것처럼, 상인일(上寅日)에는 호환(虎患)을 피하기 위한 금기가 많았다. 『전경』에 상제님께서 호랑이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사람들이 피해를 심하게 입을 것이므로, 종자를 전할 만큼 남겨두고 번성치 못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나온다.13 조선왕조실록에도 매년 수많은 사람이 호랑이에게 화를 입었다는 기록이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이렇다 보니 상인일에 노동하면 호랑이가 나타난다고 여겨서 일하지 않았다. 남의 집에 가서 대소변을 보거나 여자가 아침에 외출하면 호랑이에게 물려간다고 생각해서 되도록 집 안에 머물렀다. 혹시 호랑이가 들을세라 짐승에 관한 악담도 절대 하지 않았다. 제주도에서는 정화수를 떠 놓고 소원을 비는 행위뿐만 아니라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충북에서는 인일에 떡을 만들어 먹으면 한 해 동안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여겼다.14 이처럼 상인일은 사람을 귀하게 여겨 일하지 않거나 외출을 삼가는 등의 금기가 사람날과 겹쳤고, 인일(寅日)과 인일(人日)의 발음이 같다 보니 호랑이날과 사람날의 풍습이 뒤섞이게 되었다.15

  전북에서는 원숭이날을 의미하는 신일(申日)이 귀신날을 가리키는 신일(神日)과 음이 같아서 풍습이 혼용되었다. 이때의 신(神)은 창귀(倀鬼)를 뜻했는데, 옛사람들은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면 창귀가 된다고 생각했다. 창귀가 돌아다니며 호랑이에게 먹힐 사람을 찾아다닌다고 여겨서 일하지 않았고, 외출도 꺼렸다. 또한 창귀가 여인을 부엌으로 불러낸다고 믿었기 때문에 귀신의 음기를 누르려고 남자가 먼저 부엌으로 들어가는 지방도 있었다. 전남에서도 원숭이날에 일하지 않고 음주와 가무를 즐기곤 했는데, ‘일하지 않고 논다’라는 부분 때문에 사람날과 섞어서 생각했다.16 전라도에서 언제부터, 무엇을 계기로 원숭이날을 사람날로 생각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풍습을 통해 그 유래가 호랑이날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세시풍속사전: 정월 편』을 보면 “지금의 인일(人日) 풍속은 특별한 행사나 의례는 남아있지 않고 몇 가지 금기만 부각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금기들조차도 호랑이날 및 원숭이날 풍속과 뒤섞여 있어서 순수한 사람날만의 풍속인지는 변별해 내기가 쉽지 않다.”17고 평하고 있다. 사람날, 호랑이날, 원숭이날 모두 사람을 아껴서 일하지 않고, 금기 사항이 사람의 평안과 관련 있으며, 사람에게 복이 깃들기를 바라는 행위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사한 부분이 많은데다 해당 일자의 발음이 인일(寅日)과 인일(人日), 신일(申日)과 신일(神日)로 같다 보니 사람날, 호랑이날 풍습이 섞인 데에 원숭이날까지 더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토대로 상제님께서 적어두신 글귀를 살펴보면 구절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상제님께서는 정월 7일에 류서구가 방문할 것임을 예지하시고, 그가 ‘인일(寅日)’ 인간방에서 온다고 적어두셨다. 여기서 방문 날짜를 일진(日辰)상의 인일(호랑이날)로 보게 되면 날짜를 특정하기가 어려워진다. 1902년 음력 1월의 인일은 5일과 17일이므로, 둘 중 어느 날을 지칭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서이다. 만약 상제님께서 ‘상인(上寅)’이라고 써두셨다면 정초십이지일 풍속상의 호랑이날을 뜻하신 게 될 테지만,18 쪽지에는 인일(寅日)이라고 적어두셨다. 그러므로 『전경』에 류서구의 방문 일자가 정월 7일로 명시되어 있고, 정월 7일은 사람날이었으며, 풍습이 뒤섞인 정황으로 보아 상제님께서 예지하신 날짜는 인일(人日)과 인일(寅日)의 혼용된 표현으로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지사(地師)였던 류서구도 이러한 풍습에 익숙했을 것이다. 그는 상제님께서 3년 주유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신 후, 시루산 조모님의 묘를 옮겨서 다시 장사를 지내실 때 곁에서 보좌했었다.19 지사는 풍수지리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를 잡아 주는 일을 하므로 육십갑자를 짚는 데에 능숙한 사람이다. 류서구가 상제님께서 적어 놓으신 쪽지를 보고 경탄하게 되었다는 것은, 자신이 방문한 정월 7일을 풍습상의 사람날인 인일(人日)로 이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날 류서구가 인간방(寅艮方)에서 온다고 했는데, 인일은 외출을 피하는 날이었으므로 아마 자기 집에 머무르다가 방문했을 것이다. 예전에는 주역의 8괘(卦)와 10간(干), 12지(支)를 사용하여 각 방위의 간격을 15°씩 나누어 이름 붙인 24방위를 사용했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인간방은 북동쪽이 되므로 류서구의 집이 그 방향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일인데도 방문한 걸 보면 류서구와 상제님 부친의 사이가 매우 막역했던 것 같다. 분명 왕래를 삼가는 날임에도 자신이 오는 날짜와 방향을 상제님께서 예견해 두셨으니, 이후 류서구가 상제님을 더욱 공경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01 정재서, 『이야기 동양 신화: 중국 편』, (서울: 김영사, 2010), p.68 참고.

02 국립민속박물관 편저, 『한국세시풍속사전 : 정월 편』,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2004), p.101 참고.

03 국립민속박물관 편저, 같은 책, p.99 참고.

04 『고려사(高麗史)』 권67 지제21 예(禮)9 참고 : 가례로서 인일하의(人日賀儀) 절차가 기술되어 있다.

05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7일 계축 1번째 기사 : 癸丑人日. 群臣朝賀, 賜人勝祿牌.

06 국립민속박물관 편저, 같은 책, pp.100-101 참고. 

07 『성종실록』 187권, 성종 17년 1월 7일 갑인 2번째 기사 : 命弘文館及兵曹、都摠府入直堂上, 會承政院饋之, 令各製 ‘人日’ 律詩.

08 국립민속박물관 편저, 『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 조선전기 문집 편』,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2004), pp.134~146 참고.

09 이어령 외, 『십이지신 호랑이』, (서울: 생각의 나무, 2009), pp.246-247 참고.

10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편저, 『한국민속대관. 4: 세시풍속, 전승 놀이』, (서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출판부, 1982), p.105 참고.

11 국립민속박물관 편저, 『한국세시풍속사전: 정월 편』,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2004), p.84 참고.

12 국립민속박물관 편저, 같은 책, p.85 참고.

13 교법 3장 19절. 

14 김종대, 『33가지 동물로 본 우리 문화의 상징 세계』, (서울: 다른세상, 2001), pp.438-439 참고.

1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일(人日) 참고.

16 이어령 외, 같은 책, pp.255-262 참고.

17 국립민속박물관 편저, 같은 책, p.99. 

18 『승정원일기』 2696책(탈초본 127책), 고종 2년 11월 25일 병술 8/12 기사 : 전교하기를 “성단(星壇)에 제사를 올리는 일은 매년 정월 상인(上寅)에 시행하도록 법식을 정하라.” 하였다.

19 행록 2장 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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