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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종 :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의미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의미



교무부 최정락




  『전경』에는 “나는 생ㆍ장ㆍ염ㆍ장(生長斂藏)의 사의(四義)를 쓰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無爲而化)니라.”(교법 3장 27절)라고 하여 ‘무위이화’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무위이화는 ‘힘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변하여 잘 이루어짐’과 ‘성인의 덕이 크면 클수록 백성들이 스스로 따라와서 잘 감화됨’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전경』에는 무위이화의 개념과 관련한 자세한 설명이 없어 그 의미를 명료하게 가늠하기 어렵다. 무위이화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본 글에서는 무위와 무위이화의 개념을 동아시아 전통 문헌에서 찾아 살펴보고 대순사상에서는 무위이화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동아시아에서 무위와 무위이화


  먼저 무위이화의 개념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자.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한 노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무위이화의 출전이 되는 “무위이민자화(無爲而民自化)”라는 말을 하였다. 『도덕경』 57장에는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무위(無爲)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감화되고(無爲而民自化),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올바르게 되며, 내가 일거리를 만들지 않으면 백성들은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무욕하면 저절로 질박해진다.”01라고 하였다. 무위이화는 이 ‘무위이민자화’를 줄인 말로 성인이 인위적인 통치를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한 본래의 모습에 따라 다스리면 백성들이 저절로 감화된다는 뜻이다. 노자에 따르면 도는 만물의 본성을 따를 뿐이므로 도의 정신을 자신의 통치원칙으로 삼는 성인은 “만물의 본래 스스로 그러함을 도우며 함부로 자신의 의도를 개입시키는 인위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02라고 한다. 그래서 성인의 통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통치가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여기서 노자가 말한 ‘무위’란 아무런 행위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위가 없음(無人爲)을 뜻한다. 인위는 본래의 모습을 해치는 인위적인 조작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무위의 위(爲)는 인간 행위 전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 모습을 해치는 행위라고 해석할 수 있다. 노자는 “무위의 방식을 행하며, 일거리를 없애는 태도로 일한다.”03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의 뜻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거나 모든 구속을 거부하며 자기 의지대로 하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되 인위나 유위적 방식이 아닌 무위의 방식으로 하자는 것이다. 즉 일할 때는 특정한 목적이나 의지 혹은 체계가 개입된 일거리를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04 노자는 인간이 문명을 추구하면서 허위의식이 생겨나고 자신의 본성을 상실하여 고통받는다고 보았다. 그는 중국 사상사에서 이러한 문명을 추구한 법가나 유학의 정치 행위를 보았기 때문에 인위의 위를 하지 말라고 설명한 것이다.05 




  다음으로 『논어(論語)』에서는 작위 없는 통치를 묘사하는 데 무위지치(無爲之治)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서 공자는 “무위로 다스리신 분은 순임금이실 것이다. 무엇을 하셨겠는가? 몸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임금 자리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06라고 하였다. 이는 순임금이 자신을 끊임없이 수양하여 그 덕으로 백성을 감화시켜 다스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여 주자는 “무위로 다스렸다는 것은 성인의 덕이 융성함에 백성이 저절로 교화되어 작위하는 바가 있기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유독 순임금만을 일컬은 것은 요임금의 뒤를 이었고, 또 인재를 얻어 여러 직책을 맡겼기 때문에 더욱 유위(有爲)의 자취를 볼 수 없어서이다. 몸을 공손히 한다는 것은 성인의 덕을 공경하는 모습이니, 이미 작위하는 바가 없으면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을 뿐이다.”07라고 풀이하고 있다. 주자에 따르면 성인은 자신이 지닌 덕의 감화력을 통해 백성들이 올바른 행위를 하게 함으로써 백성 스스로가 도덕적 성취를 이루게 하는 존재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사용된 ‘무위이화’도 주로 유학의 무위 개념이 전승되어 정사(政事)를 논할 때 사용된다. 『중종실록』 기사에서는 “부역을 가벼이 하고 부세를 박(薄)하게 하여 무위이화하게 되면 도둑은 자연 없어질 것이다.”08라는 기록이 있고, 『선조실록』 기사에서는 “성인이 하는 일은 하늘의 사시(四時)와 같아서 그 교화는 자취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히 아랫사람들이 보고 감동하니 말을 하지 않더라도 믿게 되고 하는 일 없이 그대로 두어도 교화되었다(無爲而化).”09라고 하였다. 위 기사에서 무위이화는 무위의 정치로 인하여 백성이 감화되고 교화된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동아시아 전통에 나타난 무위이화의 용례를 정리하자면, 도가에서는 자연의 순리를 모델로 통치하는 성인이 인위적인 것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유학에서는 통치자가 자신을 수양하여 백성을 감화시켜 다스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용례에서 밝히고 있듯이 무위는 단순히 행위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성인이나 군주가 인위적인 제도가 아닌 덕의 함양을 통해 백성을 이치에 맞게 다스린다는 의미가 있다. 




『전경』에 나타난 무위이화   


  무위이화라는 용어가 『전경』에서 어떤 맥락으로 쓰여 있는지 살펴보아야 더욱 명료하게 무위이화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전경』에서 무위이화는 모두 세 구절에 보인다.

  첫째, 무위이화는 신도로써 크고 작은 일을 다스리면 그 일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간다는 의미이다. 상제님께서는 “신도(神道)로써 크고 작은 일을 다스리면 현묘 불측한 공이 이룩되나니 이것이 곧 무위화니라. 신도를 바로잡아 모든 일을 도의에 맞추어서 한량없는 선경의 운수를 정하리니 제 도수가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예시 73절)라고 말씀하셨다.10 여기서 무위이화는 상제님께서 정하신 도수에 따라 신명이 용사하고 이에 따라 새 기틀이 열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순사상에서는 인간의 삶 속에 신명이 함께 하고 있고 인간계와 신명계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신명계를 보면 일정한 질서와 법칙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신도’라고 할 수 있다. 즉 신도란 우주의 근원적ㆍ보편적 진리로서 우주의 운행과 질서유지를 담당하던 신명의 도라고 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이유도 인간이 물질에 치우쳐 자연을 정복하려고 하고 온갖 종류의 죄악을 끊임없이 범했기 때문에 세상에 참혹한 재화가 생겨 신도의 권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제님께서는 천지공사를 통해 상생의 천지대도를 열어놓으셨으며 신명계의 구조와 질서도 바로잡으셨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11 무위이화는 바로잡힌 신도로써 모든 일이 이루어져 나간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둘째, 무위이화는 상제님께서 생ㆍ장ㆍ염ㆍ장의 법칙을 쓰셔서 이 법칙에 따라 모든 일이 이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상제님께서 “나는 생ㆍ장ㆍ염ㆍ장(生長斂藏)의 사의(四義)를 쓰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無爲而化)니라.”(교법 3장 27절)라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에서 상제님께서 ‘사의를 쓰는 것이 곧 무위이화’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주목해보면, 생ㆍ장ㆍ염ㆍ장하는 천지자연의 법칙을 주재하는 분이 상제님이시라는 것과 이러한 법칙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져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사의와 관련하여 도전님께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즉 생장염장의 법이 있어, 낳고 크고 열매 맺고 새로 돌아가는 것이다.”12 라고 하셨다. 이처럼 사의는 순환하는 계절의 변화로 천지자연의 법칙을 설명하고 있는데, 상제님께서 이러한 사의를 쓰셔서 세상의 일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의의 법칙에는 무위이화의 속성이 담겨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셋째, 무위이화는 어려운 일이 상제님의 덕화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풀리게 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용례는 “종도들이 걱정하는 일을 상제께 고하면 그 걱정은 항상 무위이화로 풀렸도다. 그러나 고한 뒤에 다시 걱정하면 상제께서 ‘내가 이미 알았으니 무슨 염려가 있느냐’고 종도들을 위로하셨도다.”(행록 4장 52절)라는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이 상제님의 덕화로 순조롭게 풀려나간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는 「도전님 훈시」에서 “임원과 수반, 위와 아래의 도인들은 본분을 지켜 실천ㆍ노력하고 닦음을 굳건히 하면 비록 역경의 화(禍)에 부닥쳐나가도 무위이화로 풀어질 것이니, 이것이 곧 덕화를 입는 일이다.”13 라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경』에서 무위이화의 이러한 용례를 살펴보면, 첫째, 신도로써 일이 다스려져 현묘 불측한 공이 이루어지는 것, 둘째, 상제님께서 생ㆍ장ㆍ염ㆍ

장의 법칙을 쓰시는 것, 셋째, 도인의 본분을 지키고 노력하면 상제님의 덕화에 의해 어려운 일이 풀리는 것 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총괄적으로 검토해보면 하나의 의미로 종합할 수 있다. 무위이화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특별하게 일을 행함이 없어 보이지만, 인간이 감각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실질적으로 천지신명들이 상제님께서 짜 놓으신 도수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천지신명은 상제님 주재하에 작위나 인위, 삿됨이 없이 각자가 지속해서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대순사상에서 무위이화의 의미


  『전경』의 무위이화 개념에는 동아시아 전통에서의 무위이화의 의미가 수용되고 변용되어 중요한 사상적 원칙으로 제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 무위이화라는 말을 사용하신 용례는 세 가지이지만 이는 공통의 의미를 담고 있다. 무위이화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특별하게 일을 행함이 없어 보이지만, 천지신명들은 상제님께서 짜 놓으신 도수에 따라 작위나 인위, 삿됨 없이 끊임없이 각자가 맡은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일을 행함이 없어 보이는데도 도수에 따라 어떠한 일들이 저절로 변화한다는 의미에 주목해보자. 대순사상에서는 무위이화에서 ‘화’의 의미가 세상의 일이 이루어져 간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는 『전경』에 상제님께서 신도를 통해 여러 가지 일들이 이루어진다는 내용과 어려운 일이 무위이화로 풀린다는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례로 상제님께서는 도적에게 친묘의 두골을 빼앗긴 백남신에게 한적한 곳에 거처하고 기다리면 처서절에 그 도적이 두골을 다시 가져올 것이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7월 처서절이 되자 도둑이 스스로 찾아와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에 대해 상제님께서는 “모든 사사로운 일이라도 천지공사의 도수에 붙여두면 도수에 따라서 공사가 다 풀리니라.”고 말씀하셨다.14 이 말씀에서 개인적인 일이라도 천지공사의 도수에 붙여두면 무위이화로 풀려나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는 신도로써 일을 다스리면 현묘 불측한 공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신명계를 바로 잡으셨고 천지신명은 짜여진 도수에 따라 여러 가지 일들을 이루어낸다. 무위이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신적인 질서와 법칙이 작용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시선에는 아무런 행위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천지신명은 도수에 따라 각자가 맡은 직분을 쉼 없이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신도로써 크고 작은 일이 다스려지는데, 왜 ‘무위’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것일까? 이말은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신도가 인위적이지 않고 사(私)와 사(邪)가 배제된, 공평무사(公平無私)하고 진리에 지극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동아시아 고전에서 인간의 인위적인 행위로 해석될 수 있는 ‘위(爲)’와 연결되어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다. 『대순지침』에서 “우리 도(道)는 신도(神道)임을 누차 말하였으나 깨닫지 못함은 신도와 인위적(人爲的)인 사도(邪道)를 구별하지 못한 까닭이다.”15 라고 하였다. 천지신명들은 진리에 지극하고 공평무사하므로 인위적인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무위라는 말은 사사롭거나 바르지 못한 인위(人爲)가 없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전경』에는 “귀신은 진리에 지극하니 귀신과 함께 천지공사를 판단하노라”(교운 1장 19절), “신명은 탐내어 부당한 자리에 앉거나 일들을 편벽되게 처사하는 자들의 덜미를 쳐서 물리치나니라.”(교법 1장 29절)라는 말씀이 있다. 천지신명은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존재로 천지공정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무위이화는 후천에서 천지공사에 따라 온전히 실현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 후천은 성인시대로 선으로써 먹고 살 도수를 짜 놓았다고 하셨고,16 “천하가 한 집안이 되어 위무와 형벌을 쓰지 않고도 조화로써 창생을 법리에 맞도록 다스리리라. 벼슬하는 자는 화권이 열려 분에 넘치는 법이 없고 백성은 원울과 탐음의 모든 번뇌가 없을 것이며”(예시 81절)라고 말씀하셨다. 후천에서는 위무와 형벌이라는 작위적인 통치가 없어도 법리에 맞도록 다스려지고 창생은 서로 상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천지공사로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일이 무위이화로 이루어지는 모습의 한 단편이라 이해해 볼 수 있다. 

  상제님께서 대순하신 진리를 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전경』에 기록된 용어의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아시아 전통의 무위이화의 개념과 대순사상의 무위이화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대순사상에서 무위이화는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통해 짜놓으신 도수에 따라 실현되고 신명들에 의해 펼쳐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무위이화의 과정은 단순히 인간이 행하는 것이 아니기에 작위, 인위, 삿됨이 없는 신도로써 이루어지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대순사상의 무위이화 개념에 대한 많은 접근의 하나에 해당한다. 상제님 말씀에 따르면 지금도 천지공사를 통해 후천선경을 지향하는 무위이화가 펼쳐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01 『도덕경』 57장, “聖人云,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02 『도덕경』 64장, “以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

03 『도덕경』 63장, “爲無爲, 事無事.”

04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서울: 소나무, 2001), p.455 참고.

05 김충렬, 『김충열 교수의 노장철학강의』 (서울: 예문서원, 1995), pp.171-175 참고.

06 『논어』, 「위령공」,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07 『논어집주(論語集註)』, 「위령공」, “無爲而治者, 聖人德盛而民化, 不待其有所作爲也. 獨稱舜者, 紹堯之後, 而又得人以任衆職, 故尤不見其有爲之吳也. 恭己者, 聖人敬德之容. 旣無所爲, 則人之所見如此而已.”

08 『중종실록』 18권, 중종 8년 7월 19일, “輕徭薄賦, 無爲而化, 則盜可弭矣.”

09 『선조실록』 85권, 선조 30년 2월 25일, “聖人所爲, 如天之四時, 其化無迹可尋, 自然爲下民之觀感. 其不言而信, 無爲而化.”

10 ‘이것이 곧 무위화’라는 말씀과 ‘이것이 곧 무위이화’라는 말씀은 이(而) 자만 다를 뿐 해석상으로 달라지는 부분이 없다. 

11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차선근, 「신년기획: 신축년에 천지대도를 열으시고- 상」, 《대순회보》 240호 (2021), p.24 참고.

12  「도전님 훈시」 (1989. 5. 30). 

13  「도전님 훈시」 (1985. 4. 13).

14 행록 4장 28절 참고.

15 『대순지침』 p.39. 

16 교법 2장 55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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