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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이야기 : 부안 사람 이치복 종도

부안 사람 이치복 종도



교무부 신상미


▲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도



三월에 부안 청일(晴日)사람 이 치화(李致化)가 와서 상제를 섬기고 그 후 이 공삼(李公三)이 와서 추종하니라. …. (행록 5장 8절)


도주께서 다음 해 정월 보름에 이 치복(호:석성)을 앞세우고 정읍 마동(馬洞) 김 기부의 집에 이르러 대사모님과 상제의 누이동생 선돌부인과 따님 순임(舜任)을 만나셨도다. 선돌부인은 특히 반겨 맞아들이면서 “상제께서 재세 시에 늘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음을 아뢰니라. …. (교운 2장 13절)



  이치복(李致福, 1860~1944)은 도주님께서 기미(1919)년 정월 보름에 선돌부인으로부터 봉서를 받으실 때 동행한 상제님 종도이다. 『전경』에 나온 상제님 종도 중에 도주님을 뵙고 동행한 인물이므로 그에 대해 자료를 모으며 관심을 가져왔다. 전북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 청일마을에서 2.3km 정도 떨어진 청호리 원중마을에서 그의 자손을 만나 조사한 결과, 이치복과 이치화가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01 이 글에서는 조사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치복 종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치복 종도의 거처


  이치복 종도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금성군파(金城君派)이며, 부친 이석기(1817~1875)02와 모친 임(林) 씨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영노(榮魯), 자(字)는 치화(致和),03 호는 석성(石城)이다.04 이치복이란 이름은 상제님께서 이치화의 ‘화(和)’가 재앙을 뜻하는 화(禍)와 음이 같으므로 복(福)을 의미하는 ‘복(福)’ 자로 바꾸어 주신 것이라고 한다.05 교운 2장 13절에 도주님께서 상제님의 누이동생인 선돌부인을 만나러 가실 때 동행한 이치복의 호가 석성이므로 이치화와 이치복이 동일 인물이다. 『전경』에는 특별한 구분 없이 이치화(개명 전) 또는 이치복(개명 후)으로 혼용되어있으므로 조사하기 전에는 동일 인물이라고 파악하기 어려웠다. 본 원고에서는 혼란을 줄이기 위해 이치복으로 통일하여 기술하였다.




  이치복의 장남은 이중학(李重學, 1892~1978)이며, 2012년에 인터뷰한 故 이을호(李乙鎬) 씨는 이중학의 셋째 아들이다. 이치복의 넷째 부인에서 태어난 이중철(李重哲, 1902~1952)의 아들이 2022년에 인터뷰 한 이두호(李斗鎬, 1950년생) 씨이다. 두 자손에게 이치복의 생가와 살았던 곳에 대해 질문하였다. 

  故 이을호 씨의 증언에 따르면 생가는 모르고 이치복 종도가 살았던 곳은 부안군 하서면의 언독리(堰毒里) 신기(新基)마을과 청호리(晴湖里) 원중(元中)마을이라고 한다. 이중학(이치복 장남)이 언독리 신기마을에서 살다가 청호리 원중마을로 왔기 때문에 이치복도 그때 함께 이동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두호 씨에 따르면 이치복 종도의 생가는 작고한 곳인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원중마을이라고 한다.06 

  이두호 씨 증언대로라면 이치복의 생가이자 살았던 곳은 원중마을이다. 그러나 원중마을은 1910년 무렵에 부안군 동진면 당산리에 살았던 재력가 신재일(辛在一, 1863~1920)이 갯벌을 막아 조성된 마을07이므로 1860년생인 이치복 종도의 생가가 원중마을일 가능성은 없다. 1910년에 측도한 조선총독부 지도를 보면 현재 지도와 크게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1910년 무렵에 마을이 조성되었다면 이치복이 상제님을 따르던 시기(1909년)에 청호리 원중마을보다는 『전경』의 기록대로 석상리 청일(晴日)마을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석상리(石上里)는 하서면 남부지역의 마을로 ‘돌마을’이란 뜻이다. 하서면 남부지역 대부분이 변산을 등지고 형성되었으므로 돌이나 바위와 관련된 지명이 흔하다.08 이치복의 호인 석성(石城)의 한자에도 돌 석(石) 자가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살았다는 석상리 청일마을의 지명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즉, 『전경』에 따르면 이치복은 상제님 재세시 청일마을에서 살았다. 이후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고 십여 년이 지난 후에는 김제 원평에서 종교활동을 하다가 말년에 언독리 신기마을에서 청호리 원중마을로 옮겨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청호리 원중마을에서 언독리 신기마을까지 도보로 18분, 언독리 신기마을에서 석상리 청일마을까지 도보로 30분 정도로 이 세 곳은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상제님을 따른 이치복


  상제님을 따르기 전 이치복은 신원일(辛元一, 1867~1916) 종도와 함께 이옥포(李玉圃)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09 이옥포는 부안 사람으로 도교의 수련법서인 『태극제련내법(太極祭鍊內法)』을 재편집하여 『영보국정정편(靈寶局定靜篇)』을 편찬한 인물이다. 『태극제련내법』은 중국 송말 원초에 도교 영보파(靈寶派)의 인물인 정사초(鄭思肖, 1241~1318)가 남긴 저서이다. 『태극제련내법』에서 제련내법(祭鍊內法)은 죽은 자를 위하여 음식과 부주(符呪)로써 그 영혼을 제도하는 의식의 일종이다. 상권에는 귀신을 제련(祭鍊)하는 의식(儀式)과 부주가 실려 있고, 중ㆍ하권에는 제련법(祭鍊法)에 대한 편찬자의 견해가 서술되어 있다. 이옥포가 이러한 영보파 수련법에 관련된 장황한 부분을 줄이고 『중용』의 지성(至誠)을 서두에 내세워 솔성명덕(率性明德)하는 새로운 수련법문으로 개편한 것이 바로 『영보국정정편』이다.10 그러므로 이치복이 『영보국정정편』을 공부했다면 도교적인 지식이 어느 정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원일의 인도로 이치복은 장남인 이중학과 함께 1909년 3월11에 구릿골 동곡약방에 계시는 상제님을 뵙고 추종하게 되는데12 이때 그는 “내가 처음으로 지인(至人)13을 만났다.”라고 하였다.14 이치복의 지식이 해박하기도 했고, 선천 음양학(陰陽學)을 공부했던 이옥포가 제자들에게 “자신은 스승이 못 되며, 장차 강성인(姜聖人)을 지로(指路: 길을 안내함)하는 자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것15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전경』에 이치화로 기록된 구절은 행록 5장 8ㆍ21ㆍ26절, 예시 57절이고, 이치복으로 기록된 구절은 행록 5장 15절, 교운 2장 13절, 권지 1장 16절, 예시 53ㆍ54절이다. 이 구절들을 정리해보면 그는 주로 전주 동곡약방(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전주 불가지(현 완주군 이서면 이성리), 함열군 김보경의 집(현 익산시 함열)에서 천지공사를 행하시는 상제님과 함께하였다. 참여한 공사는 사명당 관련 공사(행록 5장 15절), 우사(雨師)를 불러서 비를 내리는 공사(권지 1장 16절), 헛도수 관련 공사(예시 53절) 등이다. 

  행록 5장 26절 내용을 보면 1909년 6월 21일에 신원일이 이치복과 함께 채사윤(蔡士允, 1877~1944)과 그의 처남으로부터 돈을 가져와서 상제님께 올렸다. 이 내용을 통해 그들의 친분을 추측할 수 있듯이 1905년 정월에 이환구가 신원일을 천거하여 상제님을 따르게 되고(권지 2장 21절), 신원일이 이치복16, 이치복이 청일마을 사람인 채사윤17을 상제님께 인도하였다. 

  권지 1장 16절을 통해서는 상제님과 이치복의 연령 차이를 알 수 있다. 상제님께서 전주 용두치에서 금년에 가뭄이 심할 것을 걱정하시며 공사를 행하실 때다. 이치복이 상제님을 배알하니 상제님께서 “이런 때에 나이 적은 사람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절을 받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상제님보다 11살 많은 이치복이 50세의 나이로 상제님께 사배를 올리니 상제님께서 우사를 불러서 비를 내리게 하리라 말씀하시고 술상을 차리고 이치복에게 술 두 잔을 주시며 공사를 보신 내용이다.



상제님 화천 후 이치복의 행적


  이치복은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인 1911년에 차경석(車京石, 1880~19

36)과 함께 고판례(高判禮, 1880~1935)의 교단에서 포교 활동을 하였다. 『삼덕교사(三德敎史)』에 따르면 1914년에 이치복과 김형국(金亨局)은 허욱(許昱, 1887~1939)에게 『영보국정정편』은 물론 태을주(太乙呪)와 서전서문(書傳序文) 등을 전도하였다.18 당시 허욱은 이치복을 따라 교단 활동은 하지 않았다. 이치복은 1916년 가을에 차경석과 의견 충돌로 교단을 나오게 된다.19 

  이치복이 고판례의 교단을 나와서 언제부터 포교 활동을 시작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단, 그의 활동을 정리해보면, 이치복은 1920년 10월 3일 허욱에 의해 경남 하동으로 초빙되어 의식을 거행한 후 허욱의 삼덕교(三德敎) 창립에 함께하게 된다.20 삼덕교라는 정식 교명은 무진(1928)년 윤 2월에 선포되는데21, 이치복이 그 이전에 다른 교단에서 활동한 흔적들이 보인다. 1920년 5월 28일의 《매일신보》에는 “이영노(이치복의 본명) 외 열 사람이 ‘태을교(太乙敎)’를 창립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자료인 『무극대도교개황』에 “김제군 수류면 원평리 이영노라는 자를 교주(敎長)로 해서 대정 10년[1921] 2월 2일 제화교(濟化敎: 보천교의 일종)라는 명칭하에”22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1921년 2월에 제화교가 당국의 허가를 받는다. 그러므로 이치복이 공식적으로 교단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20년에 태을교, 1921년에 제화교이다. 




  삼덕교 교조인 허욱이 이치복을 스승으로 모시며 삼덕교에서 함께 활동할 것을 권했을 때 이치복이 응한 것23을 보면 이때 그의 포교 활동이 잘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故 이을호 씨가 이치복이 경남 하동에서도 머문 것 같다고 증언하였듯24 그는 삼덕교에서 종교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1919년 정월 보름에 이치복이 선돌부인을 만나러 가시는 도주님과 동행하였으니 그 이전에 도주님과의 만남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인연의 시기는 도주님께서 1918년 가을에 “김제 원평에 가라.”고 하신 상제님의 명을 좇아 원평을 거쳐 구릿골 약방을 둘러보실 때(교운 2장 10절)로 짐작된다. 이때 상제님의 종도들을 만나셨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치복은 김제 원평에서 활동하던 시기이므로 원평에서 도주님을 만나 뵈었을 것이다. 1918년~1919년 당시 원평에서 활동한 종도는 이치복이 거의 유일하다.25 당시에 이치복 종도가 유일하게 원평에서 포교 활동한 인물이었고, 상제님 가족과도 왕래하였기에 도주님께서는 그를 앞세워 가족이 있는 곳으로 안내받으신 듯하다. 

  상제님을 따르기 전에 도교적인 수행을 했던 이치화는 1909년 상제님을 뵙고 이치복이란 이름으로 개명한 후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기 전까지 3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따랐던 종도이다. 상제님의 종도로서 도주님과의 만남도 있었고 도주님께서 선돌부인을 만나실 때 동행했던 그는 고부인의 교단, 태을교, 제화교, 삼덕교에서 종교활동을 하다가 갑신(1944)년 8월 28일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에서 85세로 작고하였다.






01 이치복 종도의 손자 故 이을호 인터뷰(2012. 10. 29,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원중마을).

02 『全州李氏金城君派世譜』 卷之三, “계유(1873)년에 성균진사로 읍지에 그의 효행이 실리기도 했다(癸酉成均進士以孝行載於邑誌).”

03 이치화(李致化)의 ‘화’ 자가 행록 5장 8절에는 화(化) 자로 서술되어 있고, 족보상에는 화(和) 자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04 앞의 책, pp.256-257. 

05 이치복 종도의 손자 故 이을호 인터뷰(2012. 10. 29,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원중마을).

06 이치복 종도의 손자 이두호 인터뷰(2022. 6. 22,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원중마을).

07 김형주, 『부안 땅이름 마을이름 속의 역사문화이야기』 (부안: 부안문화재단, 2013), p.430 참고.

08 김형주, 같은 책, p.436.

09 서상범, 『생화정경(生化正經)』 (전북: 삼덕교 교화부, 1955), p.2; 허환, 『삼덕교사』 上 (전북: 삼덕교 교화부, 1973), p.9. 

10 안동준, 「‘수심정경’의 도교적 연원」, 『원불교학』 (2002), pp.134-135 참고.

11 기유(1909)년 1월 15일에 상제님을 따랐다는 기록도 있다. (허환, 같은 책, p.158.)

12 행록 5장 8절;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증산의 생애와 사상』 (서울: 대순진리회, 1994), pp.259-260 참고; 이치복 종도의 손자 故 이을호 인터뷰(2012. 10. 29,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원중마을).

13 지인(至人)이란 노장학(老莊學)에서 도덕(道德)이 극치(極致)에 이른 사람 또는 덕(德)이 높은 사람인 진인(眞人)을 의미한다.

14 이치복 종도의 손자 故 이을호 인터뷰(2012. 10. 29,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원중마을).

15 서상범, 앞의 책, p.2.

16 허환, 앞의 책, p.158.

17 허환, 앞의 책, p.143.

18 허환, 앞의 책, pp.10-11 참고.

19 증산종단친목회, 『증산종단개론』 (증산종단친목회, 1971), pp.95-96. 

20 김홍철 외 2인,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 (익산: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pp.182-183.

21 김봉렬, 「삼덕교본부 모화동을 찾아」, 『월간 천지공사』 12호 (1989), p.17.

22 전라북도 경찰서(편), 『무극대도교개황』 (전주: 전라북도 경찰서, 1926), p.2.

23 서상학, 『삼덕교사』 (전북: 봉얼출판사, 1973), pp.142-143 참고. 

24 이치복 종도의 손자 故 이을호 인터뷰(2013. 2. 24, 서울 성북구 이을호 씨 댁).

25 박공우(朴公又, 1876~1940) 종도는 처음엔 정읍에서 포교하다가 1916년에 태인에서 태을교를 창립하였고, 1928년에는 김제 원평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이치복과 활동 시기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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