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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풍이(馮異) 神明열전
풍이(馮異) 神明 열전
『바야흐로 지금 뛰어난 영웅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백성들이 바람에 쏠리듯 기대오고 있으니 빈(邠) · 기(岐)가 주(周)를 사모했다고 하여도 지금의 상황과 비유될 수가 없습니다. 그대가 진실로 승패(勝敗)를 깨닫고 큰 계책을 정하여 고인(古人)의 공적을 거울삼아 전화위복(轉禍爲福)할 수 있는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만약 용맹스러운 장수더러 오래도록 달리게만 하고 정예병에게 성을 포위하라고만 명한다면 뒤에 혹 후회하게 되더라도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애초에 이질과 광무제는 굳게 결의하여 더욱 친애하였으나 갱시제가 서게 되자 도리어 이질은 갱시제와 함께 백승(伯升)을 저버렸다. 그가 비록 장안이 위급하다는 것을 알아서 항복하고 싶었으나 스스로 편안하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질은 풍이에게 다음과 같이 답장하였다. 『저는 본래 광무제와 모의하여 한(漢)나라를 일으키고 함께 생사(生死)의 약속을 맺고 흥망의 계책을 함께 하기로 하였습니다. 지금 저는 낙양(洛陽)을 지키고 장군은 맹진(孟津)을 다스리고 있어 함께 중요한 요새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좋은 기회를 만나 힘을 합치면 안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광무제에게 저의 우둔한 계책을 진언하여 나라와 백성을 보위하기를 원할 따름입니다.』 이질은 풍이와 편지를 주고받은 후에 다시 풍이와 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풍이는 북쪽으로 천장관(天井關)을 공략하고 상당(上黨)의 두개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또한 풍이는 남쪽으로 하남(河南)·성고(成皐)의 동쪽 13개 현을 평정하고 여러 주둔군들을 모두 평정하니 항복하는 자가 10여만 명이었다. 무발(武勃)은 만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광무제의 군대를 공격하자 풍이는 군대를 거느리고 하수(河水)를 건너와 무발과 사향(士鄕)아래에서 싸워 대파하고 무발의 목을 베고 적병 오천 여 명을 죽였으나 이질은 성문을 굳게 닫고 무발의 군대를 구원하지 않았다. 풍이는 이질이 신의를 드러낸 것을 보고 그 사실을 왕께 상주하여 알렸다. 광무제는 고의로 이질의 서신을 폭로하여 주유(朱鮪)가 알도록 하였다. 주유가 노하여 마침내 사람을 시켜 이질을 죽여버렸다. 이 일로 해서 성안이 혼란해져 항복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하여 주유는 토난장군(討難將軍) 소무(蘇茂)로 하여금 만여 명의 병사를 데리고 온(溫)땅을 공격하게 하고 주유 자신은 수만 명을 이끌고 평음(平陰)을 공격하여 풍이를 협공하려고 하였다. 풍이는 교위호군(校尉護軍)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구순(寇恂)과 합세하여 소무를 공격케 하여 그를 깨뜨렸다. 풍이가 하수(河水)를 건너 주유를 공격하니 주유가 달아났다. 풍이는 그를 낙양(洛陽)에까지 추격하여 성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돌아왔다. 격문을 돌려 상황을 보고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축하하면서 광무제에게 즉위하라고 권유하였다. 광무제는 풍이를 불러 호(鄗)땅에 나아가게 하고 사방의 동정을 물었다. 풍이가 대답하였다. 『3왕(회양왕(淮陽王)·양왕(穰王)·수왕(隨王))이 모반하고 갱시제가 패망(敗亡)하여 천하에 주인이 없으므로 종묘를 지키고자 하는 우려가 대왕에게 달렸습니다. 마땅히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위로는 사직(社稷)을 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소서.』 광무제가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 꿈에 붉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깨어나 보니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오.』풍이는 그 말을 듣자 아랫자리로 내려가 두 번 절하면서 축하하고 말하였다. 『그것은 천명이 정신에 나타난 것입니다.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은 대왕의 신중한 성품 탓입니다.』 마침내 풍이는 여러 장군들과 의논하여 존호(尊號)를 올렸다. 건무 2년 봄, 풍이는 이양하후(異陽夏侯)로 정하여 봉해졌다. 풍이는 병사를 이끌고 양적(陽翟)의 적인 엄종(嚴終)·조근(趙根)을 공격하여 그들을 깨뜨렸다. 왕은 풍이에게 조칙을 내려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의 무덤을 돌아보게 하고 태중대부(太中大夫)로 하여금 술과 고기를 보내게 하고 2백리 내의 태수 · 도위(都尉) 이하의 사람들 및 종족들을 모이게 하였다. 그때 적미(赤眉), 연잠(延岑)족이 삼보(三輔)에서 난리를 일으키고 군현의 대유지들도 각기 군대를 만들어 일어나니 대사도(大司徒) 등우(鄧禹)가 평정하지 못하여 등우 대신 풍이를 파견해 그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광무제는 하남(河南)까지 전송하러 가서 풍이에게 수레와 7척 보검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풍이에게 칙명을 내리면서 말하였다. 『삼보(三輔)가 왕망(王莽)·갱시(更始)의 난을 만나고 또 다시 적미·연잠의 만행을 겪으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의지할 데가 없다. 지금 정벌할 때에는 반드시 성과 땅을 도살·침략하지 말고 조용히 평정하고 그들을 편안히 모여 살게 해주면 그만이다. 여러 장수들이 힘껏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니겠으나 노략질을 좋아한다. 경은 본래 병사들을 잘 다스리니 스스로 칙명 받은 것을 염두에 두어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풍이는 머리를 조아려 명을 받고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이르는 곳마다 위의와 신망을 널리 폈다. 홍농(弘農)의 떼도둑 가운데 장군을 칭하는 자가 10여명 있었는데 모두 군대를 이끌고 풍이에게 항복하였다. 풍이는 적미족의 화음(華陰)에서 만나 서로 60여 일을 대치하면서 수십 차례나 싸워서 그의 장수 유시(劉始), 왕선(王宣) 등 5천여 명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건무 3년 봄, 왕은 사자를 파견해서 풍이를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배수하였다. 그 때 마침 등우(鄧禹)가 거기장군(車騎將軍) 등홍(鄧弘) 등을 거느리고 돌아왔다가 풍이와 만났다. 등우와 등홍은 풍이에게 함께 적미족을 공격하자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풍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군대가 적군과 대치한 지가 수십 일이 되오. 비록 용맹한 장수들을 여러 차례 생포했다 해도 아직 남은 적병이 많으니 서서히 은덕과 신의로써 그들을 회유하는 것이 좋겠소. 급속히 병사를 일으켜서 그들을 깨뜨린다는 것은 어렵소, 주상께서 지금 여러 장군들을 면지(冕池)에 주둔하면서 동쪽을 막으라 하시고 저에게 서쪽을 공격하라 하셨으니 그것은 우리가 한꺼번에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아주 좋은 계책이오.』 등우 · 등홍은 풍이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등홍은 마침내 다른 날 크게 싸우는데 적미족은 거짓 패한 척하고 군대의 짐을 버리고 달아났다. 수레에는 모두 흙을 싣고 콩을 그 위에 얹어 두었는데 등홍의 병사들은 굶주려 있었으므로 다투어 먹으려 하였다. 적미족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등홍을 치니 등홍의 군대는 무너져버렸다. 풍이와 등우가 군대를 합쳐 등홍을 구하러 달려가자 적미족은 조금 퇴각하였다. 풍이는 병사들이 굶주려 있고 피곤하니 잠시 쉬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나 등우는 듣지 않고 다시 싸워 크게 패하고 3천여 명의 병사가 죽고 다쳤다. 등우는 간신히 탈출하여 의양(宜陽)으로 돌아왔다. 풍이는 말을 버리고 걸어서 회계반(回谿反)으로 갔는데 그의 휘하의 몇 명만을 데리고 군영으로 돌아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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