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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8년(1998)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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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속 역사인물 : 박영효(朴泳孝)

박영효(朴泳孝)

 

          

<연구소 제공>

 

  자주적 개혁정치를 부르짖으며 정치적 혁신을 도모한 박영효.

  그는 판서 원양(元陽)의 아들이며 13세 때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하여 금릉위(錦陵尉)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에 봉해졌다. 큰형 영교(永敎)를 따라 박규수(朴珪壽)의 사랑을 출입하면서 오경석(吳慶錫), 유대치(劉大致), 이동인(李東仁) 등 실학(實學), 특히 북학파(北學派)의 학맥을 이은 개화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1879년경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등과 개화당(開化黨)을 조직하였다.

  1882년 9월 임오군란의 사후수습을 일본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특명전권대신 겸 제 3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종사관 서광범 등 14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갔다. 항해하는 배 위에서 태극4괘의 국기를 제정, 일본에 도착한 직후부터 사용하였으며 3개월 간 체류하면서 일본 정계의 지도자 및 구미 외교 사절들과 접촉하여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한편, 명치일본(明治日本)의 발전상을 살펴보았다.

  이때 그는 근대 일본의 선진제도를 관찰하였으며 서구의 발전된 문물을 목격하여 국내에서 그것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1883년 초 귀국한 뒤 한성판윤에 임명되어 박문국(博文局), 순경부(巡警部), 치도국(治道局)을 설치하여 신문개발시책을 폈다. 그러나 민태호(閔台鎬), 김병시(金炳始)등 수구파의 반대에 부딪혀 삼국(三局)은 폐쇄되고 좌천되었다.

  이듬해에는 개화당 인사들과 정원장악을 위해 미국의 협조를 구했으나 미국이 불응하자 일본에 접근하여 군사지원을 확약 받고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켜 친청수구파(親淸守舊派)를 숙청하고 혁신내각을 수립하여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청국군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8년 초 일본에 있으면서 고종에게 국정전반에 관하여 장문의 개혁 상소를 올렸는데 이것이 개화상소(開化上訴) 혹은 건백서(建白書)이다. 이 상소문에서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철폐, 근대적인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그의 개화정치에 대한 이상이 설계되어 있으며 그 뒤 그가 시행한 개혁정치는 그것의 실천이었다고 볼 수 있다.

  상제님을 따르는 종도 중에서 김병욱이라는 자가 있었다. 김병욱은 계묘(癸卯)년(1903) 4월부터 남원(南原)의 세금을 거두는 관직에 있었는데 이 때에 박영효(朴泳孝)가 일본에 망명하여 혁명을 도모하고 병욱이 또 그에 연루되었다.

  관은 그 당원을 체포하기로 정하고 팔월에 포교가 서울로부터 남원으로 내려와서 병욱을 찾았으며 전주 군수 권직상도 병욱의 거처를 알기 위해 포교를 전주에서 남원으로 보냈다. 그 전날 미리 상제께서 남원에 가셔서 병욱을 숙소의 문 바깥에 불러내시고 그로 하여금 수합한 세금을 숙소 주인에게 보관시키고 가죽신대신에 짚신을 신게 하고 밭둑과 언덕을 걸으시니 병욱은 묵묵히 뒤만 따랐다.

  한 주막에서 점심을 끝내시고 다시 걸어가시다가 병욱의 선산밑에 이르니 때는 이미 저물었다.

  그제서야 상제께서 병욱을 돌아보시고 묘소를 물으시니 바로 이곳이라고 병욱이 아뢰니 상제께서 또 묘형(墓形)을 물으시니 와우형(臥牛形)입니다고 여쭈는 지라 말씀하시되 「그러면 소 우는 소리를 들어야 참이 되리라」하시고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시니 산아래서 소 우는 소리가 나는지라 병욱이 소의 울음소리를 아뢰이니 상제께서 「먼데서 들리면 소용이 없나니라」하시고 한참 있으니 이상하게도 한 사람이 소를 몰고 묘 앞으로 지나가는데 소가 크게 울었다.

  상제께서 가라사대 「혈음(穴蔭)이 이미 동하였도다」하시고 자리를 떠서 그 산소의 재실로 내려가 이곳에서 그 날 밤을 새우셨다.

  이튿날 상제께서 묘지기를 남원에 보내어 형세를 알아보게 하시니 그는 남원에 갔다 와서 서울 포교가 병욱을 수색함을 아뢰니 이때 비로소 병욱이 깨닫고 크게 두려워하여 몸 둘 곳을 몰랐다.

  상제께서는 다시 묘지기에게 여자가 타는 가마를 마련케 하고 병욱을 거기에 태우고 전주 상관(上關) 좁은 목에 이르러 병욱으로 하여금 먼저 서원규의 집에 가서 정세를 자세히 살피게 하셨다. 그는 먼저 원규의 집에 들어서니 원규가 몹시 놀라면서「그대가 어떻게 사지를 벗어났으며 또 어떻게 하려고 이런 위지에 들어섰느냐. 너무나 급한 화이기에 미처 연락할 새가 없었노라. 여러 친구와 그대의 가족들이 근심 걱정하는 중이니라」고 말하였다.

  병욱은 포교들이 전주를 떠나 남원으로 향하고 상제와 자기가 남원을 벗어 나온 때가 겨우 한나절 사이 밖에 되지 않는 것을 원규로부터 듣고 상제께서 천신이심에 탄복했다.

  포교는 남원에 이르러 병욱을 수색하다가 찾지 못하고 전주로 돌아와서 군수 권직상을 조르고 각처에 게시하거나 훈령을 내려 병욱을 잡아들이게 하는 중이었다.

  병욱은 서원규의 약국이 서천교(西川橋) 네거리의 번화한 곳임을 몹시 걱정 근심하였으되 상제께서 나중에 찾아 오셔서 병욱에게 근심 말라고 이르셨다.

  상제께서 병욱을 데리시고 왕래하시면서 거리에서 병욱의 이름을 높이 부르시니 병욱은 더욱 당황하여 모골이 송연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여러 사람을 이곳 저곳에서 만났으되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 후에 상제께서 병욱을 장흥해의 집으로 옮기고 그 곳에 석 달 동안 머물게 하셨다.

  석 달이 지나서 상제께서 병욱에게 마음을 놓으라고 이르시니 일로전운(日露戰雲)이 급박하여 일병이 국토를 통과하고 국금을 해제한 때가 되어 박영효에 대한 조정의 혐의도 풀렸다.』(교운 1장 12∼14절)

  김병욱을 통한 박영효의 공사를 처결하신 후 국내에서의 정치적 변동은 친일세력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상제께서는 개화정치를 부르짖은 박영효의 원을 풀어주신다고 하시면서 「천포 천포 천천포 만포 만포 만만포 창생 박영효 (千胞 千胞 千千胞 萬胞 萬胞 萬萬胞 蒼生 朴泳孝)」 라고 쓰고 불사르셨다.』 (공사 2장 22절)

  이로써 박영효는 상제님의 역도(逆度)를 조정하는 공사에 의해 이상적인 개화정치를 펴나갈 수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국권이 강탈된 후 일제가 회유정책의 일환으로 수여한 후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3·1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의 문화통치에 순응하여 유민회(維民會), 동광회(同光會), 조선구락부(朝鮮俱樂部), 민우회(民友會)등 친일내지 개량주의적 단체와 관계를 맺은 한편,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1926년 중추원 의장, 1932년 일본귀족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부의장 재직 중 죽었는데 저서로 사화기략(使和記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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